[동아광장/김형준]‘3대 난치병’에 빠진 한국 정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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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 결핍증, 집단 기억상실증, 도덕 불감증 걸린 한국정치
기형적 정치제도와 문화 3류 정치 의식 안바꾸면 난치병 치유 불가능
총선 노린 ‘혁신 시늉’ 그만하고 작아도 의미있는 혁신 실천하라

김형준 객원논설위원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김형준 객원논설위원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한국 정치가 무기력과 무책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민생은 온데간데없고 정쟁만 판을 친다. 역사 교과서 논쟁에서 보듯이 현안의 본질은 사라지고 저질 공방만 난무한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가 왜 이 모양 이 꼴이 됐을까. 치유하기 힘든 ‘3대 난치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첫째, 선천성 상생 결핍증이다. 여야, 진보와 보수 모두 진영의 논리에 빠져 사생결단의 싸움에만 익숙하다. 대화와 타협은 찾아볼 수 없고 자신은 선, 상대방은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회색이 아름다워야 민주주의가 꽃을 피울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정치에서는 오직 흑과 백만이 존재한다. 이렇다 보니 우리 사회가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뤘지만 전무 아니면 전부라는 식의 ‘대결적 민주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둘째, 집단 기억상실증이다. 여야 모두 집권 경험이 있는데 여당일 때 다르고 야당일 때 다르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정권이 바뀌면 180도 달라진다. 가령, 노무현 정부를 계승한다는 야당은 정권이 바뀌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정치권이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보다는 그때그때 당리당략에 따라 처신하다 보니 말 바꾸기가 일상화되고 있다.

셋째, 도덕 불감증이다. 정치인의 도덕적 해이는 이미 오래전에 임계점을 넘은 듯하다. 민의의 전당이어야 할 국회가 의원들의 각종 비리와 자질 부족으로 신뢰를 잃고 있다. ‘성추문 논란’으로 의원직을 사퇴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면책특권을 교묘하게 이용해 정확한 근거 없이 ‘대통령선거 개표 부정’ 의혹을 제기하는 의원까지 나왔다. 분명 이런 난치병을 치유하지 않고는 대한민국 정치의 미래는 없다.

그렇다면 정치 난치병은 치유될 수 있을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정치에는 고속 압축 성장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제도와 정치문화가 바뀌고 정치인과 국민의 의식이 바뀌어야 하는데 경제와는 달리 바뀌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당장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으면서도 내각제식으로 운영되는 기형적인 권력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내각제식으로 운영되다 보니 여당은 무조건 정부를 옹호하고 야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에 빠진다. 대통령제가 성공하기 위한 제1법칙은 여야가 함께 행정부를 견제해 건강한 정부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데 4년 중임제 개헌을 하면 정치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기형적인 ‘합의의 덫’에 빠져 있는 국회의 운영 구조도 정치 몰락의 큰 원인이다. 소수 독재를 정당화시키는 국회선진화법뿐만 아니라 모든 의사일정을 원내 교섭단체 간 합의를 통해서만 이뤄지도록 한 것이 오히려 여야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어느 한쪽이 합의하지 않으면 모든 의사일정이 올 스톱되기 때문이다.

임의단체에 불과한 정당이 국회와 의원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잘못됐다. 당의 소수 실력자가 공천권을 무기로 당론을 남발하면서 의원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데 어떻게 의원들이 자신의 소신과 양심에 따라 의정 활동을 할 수 있겠는가. 국민에게 공천권을 돌려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뒤틀리고 왜곡된 정치 서식 환경 속에서 의원들은 생존을 위해 권력의 눈치를 봐야 하고 계파에 줄을 서야 한다.

진단이 정확해야 올바른 처방을 내릴 수 있다. 여야가 내년 총선을 의식해 혁신 경쟁을 하고 있지만 진정 한국 정치를 살리려면 3대 난치병을 치유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한다. 지금까지 정치권은 끊임없이 혁신을 한다고 목청껏 외쳤지만 실패했다. 반드시 해야 할 혁신은 하지 않고 혁신의 시늉만 냈기 때문이다. 아마존 강의 보잘것없는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엄청난 해일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나비 효과의 핵심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치권의 작지만 의미 있는 혁신 실천으로 3대 난치병이 치유되는 엄청난 나비 효과가 만들어지길 바란다.

박근혜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인 2004년 10월 27일 국회 연설에서 “경제가 무너지고 나라가 잘못된 후에 누구를 탓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제는 선택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 모든 것이 대통령과 여당이 선택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올바른 선택을 바랍니다”라고 했다. 올바른 역사관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선택과 올바른 정치는 더 중요하다.

김형준 객원논설위원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한국정치#난치병#무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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