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건설 매각에 실패한 후폭풍은 엄청났다. 비싼 값에 대우건설을 사들였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한 번의 투자 실패로 사실상 그룹의 절반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가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금호가 대우건설을 사는 데 뒷돈을 대준 금융회사들은 손해는 손해대로 보고 ‘무리한 베팅인 줄 알면서도 금호를 부추겼다’는 도덕적 비판까지 받고 있다. 대우건설 내부에는 정체불명의 외국자본에 넘어가느니 은행 관리가 낫다는 의견이 많지만 맥이 빠지기는 마찬가지다. 2008년 시공능력평가 1위의 한국 대표 건설사라는 자존심이 큰 상처를 입었다.
민유성 산은금융그룹 회장 겸 산업은행장도 누구 못지않게 착잡할 것이다. 그가 지난해 산업은행 민영화로 바쁜 와중에도 대우건설 매각에 매달린 것은 이런 사태를 예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우건설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나름대로 복안이 있으니 믿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산업은행 주도로 사모펀드(PEF)를 만들어 좋은 조건으로 대우건설을 되사주는 방안을 제시하면 금호 측이 받아들일 줄 알았다. LG, 포스코처럼 자금이 넉넉한 대기업들에 대우건설을 넘기는 해법도 염두에 뒀다.
그러나 상대는 기대한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애당초 대우건설 문제는 투자자들의 풋백옵션(투자수익보장장치) 행사 시기가 닥치기 전에 뇌관을 제거해야 하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확률이 높지 않은 대우건설 입찰에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모두가 걱정한 시한폭탄이 터진 것이다.
민 행장만 탓할 일도 아니다. 기업 구조조정의 최전방 지휘관으로 나섰지만 그의 손에 쥐어진 무기와 실탄은 빈약했다. 기업들이 볼 때 그는 많은 돈을 빌려준 국책은행 행장일 뿐 ‘당국자’는 아니었다. 당국은 그에게 대리인 역할을 맡기면서도 기업의 자구조치를 강제할 권한까지 주지는 않았다.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촉구하는 그의 말이 시장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공허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민 행장이 작년에 금호와 씨름하다 끝내 해결하지 못한 과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큰돈을 떼이게 된 투자자들을 다독여 공중에 떠버린 대우건설의 소유구조를 안정시키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워크아웃에 들어간 금호 계열사들이 기력을 되찾도록 하는 데도 성과를 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산은그룹의 장래에 대한 소속 직원들의 불안감을 해소해줘야 하는 숙제까지 안고 있다. 2300명의 직원에 지점이 고작 44개인 은행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악역도 마다하지 말아야 하고 잘해야 본전인 금호 구조조정보다는 자신이 이끄는 조직의 운명과 직결되는 타 은행 인수에 더 애착이 갈지 모른다. 하지만 시장의 신뢰를 쌓지 못하면 은행 인수합병(M&A) 경쟁의 승리도 장담하기 힘들다. ‘정부가 지분을 갖고 있는 산은이 잘되는 게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은행권 재편의 방정식을 유리하게 푸는 데는 한계가 있다. 손에 잡히는 실적을 거둬 민 행장의 경영능력, 나아가 산은의 경쟁력에 대한 평가를 바꾸는 것은 은행 M&A를 산은이 주도할 명분을 얻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1년 7개월 동안 그의 명함은 산업은행 총재에서 행장으로, 다시 산은금융그룹 회장 겸 행장으로 세 번이나 바뀌었다. 금호 구조조정 성적표는 또 한 번 명함의 질과 내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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