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상인]햇볕정책은 세습독재의 동반자

  • 입력 2009년 6월 24일 02시 59분


봉하마을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최종적으로 떠민 것은 자식들일지도 모른다. 미국에 체류하던 아들과 딸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노 전 대통령은 ‘탈진해서 말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이 문재인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전언(傳言)이다. 그렇다면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그도 결국에는 자식 앞에 무너진 것일까.

자식 때문에 넘어지는 경우가 어찌 이뿐이겠는가. 삼성그룹 경영권 불법승계 논란도 사정은 비슷하다. 최근 대법원의 무죄 판결이 있기는 했지만 이건희 회장은 이미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다. 몇 년 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맞고 들어온 아들을 위해 집단적 보복 폭행을 불사한 적이 있는데, 이로써 그는 폭력혐의로 구속된 최초의 재벌총수가 되었다.

한국인은 가족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이른바 ‘가족자아(family ego)’의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 일본 임상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 씨의 비교평가다. 우리는 자식을 ‘또 다른 나’로 인식하는 정서가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서양인들과 비교할 때 더 확연하다. 전통적으로 서양 문화권의 아버지들은 자식들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확실히 전달하고 가르친다. 사회정의를 두고 부자지간에 ‘단절원리’가 심심찮게 발동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비해 우리는 아버지 중심적인 가족주의 습성을 면면히 계승하는 편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동일체로서의 ‘포용원리’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자식은 ‘또 다른 나’ 한국인 정서

이런 한국적 부정(父情)의 결정판은 목하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의 부자세습 행태다. 최근 북한은 김정일의 3남인 20대의 김정운을 후계자로 공식화했다고 한다. 그는 현재 ‘영명한 동지’라는 이름으로 포스트 김정일 시대를 준비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북한은 김일성 탄생 100년이 되는 2012년까지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고 2009년에는 문패를 달겠다고 호언했는데, 김형직-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만경대 3대 위인’ 가계우상화 프로젝트 속에 마침내 김정운이 그 문패의 주인공이 되는 모양이다.

김정일-김정운 부자간 권력승계는 지난 10여 년간 북한의 여러 가지 독특한 행보와 그로 인한 남북한의 정세변화에 대해 뒤늦게나마 진실을 웅변하는 듯하다. 헤겔이 말한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뜻이 분명해진다는 의미에서다. 돌이켜보면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남한의 햇볕정책은 처음부터 독재 권력의 부자세습과 결코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는 사안이 아니었나 싶다.

북한이 핵실험에 박차를 가하고 도처에 무시로 미사일을 쏘아대는 진짜 숨은 이유는 온 세상이 무서워하는 초강력 무기 하나를 권력 승계자의 수중에 쥐여주고 싶은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아닐까 한다. 만약 북한이 핵보유국의 지위를 얻게 된다면 그 이상의 권력자원이 또 있겠는가. 이와 더불어 북한 정권에 대한 남한 사회 내부의 지원세력 구축과 우호 분위기 조성은 김정운 체제의 순항을 위해 너무나 절박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돈 보따리를 앞세운 햇볕정책이야말로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이 아니었을까.

언제부턴가 우리 대한민국은 북한이라는 군사독재국가에 대해 거의 무장해제한 상태가 되었다. 핵개발을 강행하거나 미사일을 발사해도 사회적 긴장감은 결코 고조되는 법이 없다. 햇볕정책 이후 국가안보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촌스럽게 되었고, 권력세습을 거론하는 것 또한 눈치 없는 행동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화두는 ‘민주주의의 후퇴’다. 이른바 ‘조문정국’ 논쟁에 비하면 북한의 최근 급변사태 따위는 ‘깜’도 아니다.

권력승계자에 주는 초강력 무기

싫든 좋든 김정일-김정운 부자간에 이루어지는 북한의 권력세습은 북한 인민이 주시하고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본격적인 실험무대에 올랐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북한의 선택을 놓고 남한의 햇볕주의자들이 인권이나 민주주의, 평화나 진보 등에 대해 더 말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점도 역사적 심판대에 함께 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김일성-김정일 부자간 권력세습은 햇볕정책 시대 이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독재세습은 햇볕주의자들 눈앞에서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니 이에 대한 소감이나 평가를 어찌 피해 갈 수 있겠는가. 햇볕정책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작금의 북한정세에 대한 생각의 진솔한 정리를 더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

전상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환경대학원교수·사회학 sang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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