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더 많은 사람’의 진실

  • 입력 2008년 5월 20일 02시 57분


다수결의 원칙은 오늘날 민주사회에서 결코 양보하거나 유보할 수 없는 황금률이다. 다수의 국민이 선거에서 선택한 인물이 민의의 대변자로서 국정을 관리한다. 그 후에도 국민 다수의 여론은 언론이나 그 밖의 수단들을 통해 국정에 반영된다.

그러나 이 같은 원칙이 ‘다수결’의 미덕을 신성불가침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어느 지역의 주민들이 독립이나 자치를 원할 경우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 언뜻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이 지역에 투표를 실시하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거대한 힘과 인구를 가진 ‘종주국’이 해당 지역에 주민들을 대거 이주시켜 다수로 만들어 버렸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의건 타의건 이 지역에 흘러들어온 새 주민들도 권리를 가진 인간이니 이들까지 포함시켜 투표로 결정해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을 국제사회가 당연한 ‘룰’로 간주한다면, 이는 강국이 새로 편입한 지역에 ‘식민’하는 데 더욱 공을 들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은 몰도바의 트란스드네스트르 지역이나 구소련 곳곳에서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코소보의 분리 독립이 논란거리인 이유도, 세르비아 측이 “역사적으로 세르비아의 고토(故土)인데 세르비아인들이 강제 추방된 결과 소수가 되었다”라는 일면 설득력 있는 논리를 펴기 때문이다.

다수결로 가려낼 수 없는 일은 이 밖에도 또 있다. ‘당위의 법칙’이 아닌 ‘존재의 법칙’을 투표로 결정할 수는 없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을 때도 지구는 둥글었다.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사회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조상 이야기’에서 한 선배 연구자의 미덕을 칭송한 뒤 은근히 그를 꼬집는다. 강의실에서 그가 학생들에게 “어느 학설이 옳다고 생각하느냐?”라며 거수투표를 시키곤 하는 나쁜 습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딱한 일이다. 과학적 진실은 투표로 결정되는 게 아닌데”라고 도킨스는 덧붙였다.

기자가 앉아 있는 자리 창밖으로는 날마다 수많은 촛불이 넘실댄다. 당연한 민의 표출이며 시민의 권리다. 기자도 정부나 그 누구로 인해 권리를 침해받거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나가서 촛불을 들 용의가 있다. 아니 들 것이다.

그러나 괜한 기우에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더 많은 사람이 우리의 믿음에 함께할수록 그 믿음은 더욱 진실이 된다’는 착각에 혹 휩쓸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그것이다. 과학적 진실의 판단은 전문가인 과학자들에게 맡기고, 그들의 판단을 바탕으로 시민들은 ‘과연 정부가 다수를 위한 선을 행했나’ ‘국익에 따라 최선을 다했나’라는 ‘당위의 법칙’만을 물어야 한다.

더군다나 ‘전문가’와는 거리가 먼 대중의 우상(아이돌)들이 나서 청소년을 포함한 대중의 판단에 이런저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찬성하기 어렵다. 물론 그들도 시민의 일원이며 얼마든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은 ‘해당 분야의 자격을 갖추지 않은 이들이 대중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데 이 시대의 위험이 있다’고 질타한, 호세 오르테가이가세트의 한 세기 전 명저 ‘대중의 반역’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은 ‘더 많은 사람’이 아닌 ‘더 많은 진실’로 공방할 때인 듯하다.

유윤종 국제부 차장 gustav@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