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녕]고장 난 디지털 청와대

  • 입력 2008년 3월 18일 02시 58분


미국 대통령이 바뀌면 가장 먼저 인수인계하는 것이 핵가방이다. 핵가방은 유사시 대통령이 즉시 핵무기 발사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장치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때인 1960년대 초 쿠바 미사일 위기 직후 처음 등장했다. 구소련도 이에 대응해 유리 안드로포프 서기장 때인 1983년 핵가방을 도입했다. 핵가방은 그림자처럼 군 통수권자를 따라다닌다. 우리는 2월 25일 0시 군 통수용 지휘전화 박스를 이양하는 것으로 첫 정권 인수인계를 시작한다.

▷그러나 핵가방이나 군 지휘전화 박스 이양은 정권 교체의 상징적 조치에 지나지 않는다. 실질적인 정권 인수인계는 총체적인 대통령 업무를 주고받는 것으로, 새 대통령이 집무실에 첫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2월 25일 저녁부터 내부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작동하는 데 열흘이나 걸렸고 그 후에도 한동안 정상 작동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 대통령이 15일 행정안전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직접 밝힌 일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이후 ‘디지털 청와대’를 만들겠다면서 이지원(e知園)이란 인터넷 통합관리 업무시스템을 개발했다. 자신을 포함해 시스템 구축에 참여한 5명 공동 명의로 2006년 2월 특허까지 받았다. 이지원은 ‘디지털 지식정원’의 약자로, 문서 생성부터 결재 후 기록까지 모든 단계의 업무 처리 과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노 전 대통령 측은 이를 통해 모든 청와대 업무를 인계하겠다고 했으나, 정상적인 업무 인수인계는커녕 컴퓨터 작동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정보통신 강국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국정의 심장부인 청와대에서 어떻게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정권 인수인계 과정의 단순한 실수나 허점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중차대한 사태이다. 도대체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영어교육으로 시끄럽게 한 것 말고는 무얼 했는지 모르겠다. 두 번 다시 이런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쪽의 잘못인지 책임 소재를 가려야 한다. 차제에 원활하고 빈틈없는 정권 인수인계를 위한 치밀한 청사진을 마련할 일이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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