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함세웅 신부의 奇跡

  • 입력 2007년 11월 25일 20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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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삼성 비자금’ 기자회견을 보는 순간,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차(時差)의 혼돈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정의구현사제단이라니? 분명 그때 그 사제단인데 사제단과 김 뭐라는 변호사, 그리고 삼성은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공간은 분명 같은 공간인데, 시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2007년 10월 29일이 아니었다.

그 기자회견의 힘으로 사흘 전 국회에서 재석 의원 189명 가운데 155명이나 찬성한 삼성 특검법안이 통과됐는데도 좀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의구현사제단은 1970년대 김지하 시인의 구명운동에 앞장섰고, 80년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조작 및 은폐 의혹을 밝히는 데 횃불을 들었던 바로 그 사제(司祭)들이다. 권력의 폭압 앞에 시민, 지식인들의 양심은 호소할 곳을 찾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손을 내민 곳이 사제단이었다. 사생(死生)을 뛰어넘는 사제들의 용기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고, 정의구현사제단은 사제들답게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김 뭐라는 변호사도 사제들 외에는 찾아갈 곳이 없었을 만큼 신변의 위협이라도 느꼈단 말인가. 사제들도 그래서 기자회견을 대행(代行)해 줬단 말인가. 명색이 20년간 기자 생활을 했지만, 나로서는 당최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특검법안이 통과되던 날,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와 오충일 대표가 국회 통과 결과를 ‘보고’하러 서울 제기동 성당을 찾아가자 함세웅 주임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삼성 구조본부와 전략기획실이 이건희 회장 부자를 위해 존재하는 게 문제다. (삼성 비자금 문제가) 잘 정리되면 (삼성의) 국제신인도가 올라갈 것이다.”

올해 65세로 정의구현사제단의 대부(代父)인 함 신부는 “(삼성 특검이) 기적같이 왔다”는 말도 했다. 성직자가 왜 특정 기업의 지배구조와 국제신인도를 걱정하는지 알 수 없지만, 특검법 통과를 ‘기적’에 비유하는 걸 보면서 나는 비로소 내 시차의 이유를 알았다. 실은 내 시차가 아니라 함 신부와 사제단의 종교적 아집이 만들어 낸 시차였다. 사제들은 자신들이 1970, 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살리기 위한 ‘기적(奇跡)’을 행했다고 믿는 모양이다. 사제단은 2차 성명에서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어릿광대와 불타는 마을’을 인용해 “화마(火魔)로부터 마을과 인명을 구하기 위해 ‘불이야’ 하고 외치는데도 오히려 우리를 우스꽝스러운 거짓말쟁이로 몰고 있다”며 분노했다.

삼성과 이건희 회장을 대한민국을 불태우는 ‘화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2007년의 대한민국이 그 정도의 ‘거악(巨惡)’도 몰라볼 만큼 미개한 사회란 말인가. 아니, 정말 그 지경이라면 삼성이 아니라 ‘대한민국 특검’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른바 민주화의 주역들이 무능과 무책임으로 국정을 어지럽혀 왔는데도 이 나라가 세계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 삼성으로 대표되는 글로벌화한 기업과 민간의 저력 덕임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아닌가.

정 후보의 ‘훈시(訓示)’는 더 가관(可觀)이다. 그는 함 신부 앞에서 “삼성은 이번 일을 계기로 글로벌 스탠더드로 가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 명의까지 도용해 경선 선거인단을 조작한 사람이 글로벌 스탠더드 운운하고 있다. 한마디로 ‘광대놀음’이다.

김창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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