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차관님, 택시부터 한번 몰아보시죠

  • 입력 2006년 3월 11일 03시 09분


코멘트
중앙부처 차관급 선배 한 사람이 5·31 단체장(시장) 선거에 출마할 생각이 있어서 고향에 갔다가 망신만 당했다고 한다. 집안 아저씨뻘 되는 어른에게 인사를 갔더니 책망부터 하더란다. “이 사람아, 그러려면 자주 좀 내려오지, 평소에는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동문수학하던 친구들의 반응도 비슷했단다. “암, 자네가 인물은 인물이지…. 그런데 경선은 어쩔 참인가?” 분위기도 냉랭한데 경선 대책부터 물어보니 더 할 말이 없더라는 것이다.

선거를 80여 일 앞두고 공무원이나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에게서 이런 얘기를 자주 듣는다. 예전 같으면 모셔 가듯 했을 텐데 요즘은 전화 한 통이 없고 게다가 경선까지 치러야 하니, 움직일 엄두가 안 난다는 것이다. 하긴 고향에서 오랫동안 터를 닦아 온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지방 촌놈이 명문대를 나오고 고시까지 패스해 지금도 수재(秀才) 소리를 듣는다지만, 고향에 눌러 살면서 애경사(哀慶事) 빠뜨리지 않은 이들을 어떻게 당하겠는가.

푸념은 상향식 공천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한다며 당원과 주민 손으로 후보를 뽑게 해 놓으니 뚫고 들어가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상대는 당원들 마누라 생일까지 챙기는데 무슨 수로 경선을 하겠느냐”며 한숨만 쉰다.

그동안 세 차례의 지방선거를 치르면서 중앙 관직(官職)의 시세가 크게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지방 정치인의 층이 두꺼워진 데다가 ‘서울 인재’보다 새벽이면 동네 비질이라도 할 줄 아는 ‘고향 인재’가 낫다는 의식까지 생겨 좀처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고향을 얼마나 자주 찾았느냐, 평소 소소한 지역 민원을 얼마나 잘 해결해 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사람의 능력과 경륜이 내 고장 발전에 필요하다면 모셔서라도 쓸 수 있어야 한다. 자치단체가 현대판 호족(豪族) 격인 지역유지들의 정치 놀음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수혈(輸血)은 필요하다.

중앙부처 차관급까지 올라가기 위해 본인은 또 얼마나 노력했겠는가. 선거를 염두에 두고 툭 하면 고향 행사에 얼굴이나 내밀고, 연말연시엔 연하장 보내기에 바빴다면 그 자리까지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야근을 밥 먹듯이 했을 것이고 휴가는 반납하기 일쑤였을 것이다. 이런 성실함도 크게 보면 내 아이들이 듣고 배워야 할 향리(鄕里)의 자산이다.

그렇긴 해도 출마 희망 공직자들도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누구나 “고향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서”라고 하지만 대개는 자리 자체에 대한 욕심 때문에 나서려는 것 아닌가. 공직자로서 누리면서 살아온 삶을 연장해 보려거나 승진 누락에서 오는 상실감을 만회하려고 출마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대통령에게 등 떠밀려 나오는 사람도 물론 있고.

이래서는 경선이란 장벽이 없어도 성공하기 힘들다. 한 고장의 리더가 되려면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한다. 내가 시장 군수가 되면 고향 사람을 위해 헌신해 그들의 삶을 더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야 한다. 결코 일신의 안락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확신 유무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아직도 출마 여부로 고민 중인 공직자가 있다면 한두 달이라도 좋으니 택시운전사를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택시를 몰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내 고장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누가 어떻게 사는지, 무슨 일로 기뻐하고 무슨 일로 슬퍼하는지가 백미러 보듯 보인다는 것이다. 손님들의 하소연만 들어도 시국이 보이고 민심이 읽힌다는 것이다. 2000년 총선에서 낙선한 후 10개월간 서울에서 택시운전사를 했던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은 “운전석에 앉아서 비로소 내가 그동안 보았던 모든 것이 껍데기였음을 알았다”고 했다. 어쩌면 하루 사납금(社納金) 8만여 원을 채우려고 12시간 꼬박 택시를 몰아야 하는 고단한 일상 자체가 고향과의 30년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게 해 줄 ‘귀속(歸屬) 절차’일 수도 있다.

출마할 공직자의 공직 사퇴 시한이 20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선거는 기초의원 유급제 도입 등으로 경쟁률이 전보다 훨씬 높을 전망이다. 이미 출마를 결심했거나 아직도 고민 중인 공직자는 한 가지만 생각했으면 한다. 내 빈 택시로 집집마다 행복을 실어 나를 자신이 있는지를.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 @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