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실없는 나라’

입력 2005-11-23 03:05수정 2009-10-08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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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개막된 18일 낮.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회의장인 벡스코 현관에서 각국 정상을 맞고 있었다.

현관 앞에 도착한 캐딜락 리무진에서 내린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노 대통령과 기념촬영을 한 뒤 노 대통령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벡스코 내에 있던 취재기자들 사이에선 ‘부시의 친근감의 표현’이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지만 현장에 있던 필자의 느낌은 달랐다. 2년여 전 봤던 장면이 불현듯 겹쳤기 때문이다.

2003년 6월 1∼3일 프랑스 에비앙에서 열린 G8(서방선진7개국+러시아) 정상회의. 이 회의의 관심사 중 하나는 미국과 프랑스의 화해, 사실상 ‘프랑스에 대한 미국의 용서’였다.

이라크전쟁 반대의 선봉에 섰던 프랑스는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난 뒤 경제적 보복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개전(開戰) 전 반미의 기치를 들어 지지율이 80%까지 올랐던 자크 시라크 대통령도 초조해하던 상황이었다.

당시 파리 특파원이었던 필자는 현장에 있었다. 그때도 부시 대통령은 노 대통령에게 한 것처럼 시라크 대통령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다소 놀란 듯한 시라크 대통령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의 냉랭하던 관계가 이런 제스처로 풀렸을까. 물론 아니다. 부시 대통령은 회의 도중인 2일 중동으로 떠나 버려 호스트인 시라크 대통령을 사실상 무시했다.

당시 만난 프랑스 기자는 “57세의 부시가 자신의 아버지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이미 두 번이나 프랑스 총리를 지낸 71세 시라크의 어깨를 두드린 것은 일종의 우월감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시라크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미국과 프랑스의 국력 차이 때문이다.

국력 차이는 이번 APEC 회의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부시 대통령은 주최 측에서 제공한 의전 차량 대신 자국에서 공수해 온 차를, 그것도 3대만 벡스코에 입장하게 돼 있는 의전을 무시하고 5대를 현관까지 몰고 왔다. 한미 외교장관회담 때도 테이블에 국기를 세우지 않는 관례에도 불구하고 성조기를 세우라고 요구해 관철했다. 첫날 정상회의가 끝난 뒤에도 순서를 무시하고 가장 먼저 회의장에서 떠났다. 외교통상부는 “모두 사전 양해를 구했다”고 했지만 그 말이 더 허탈하게 들렸다.

노 대통령은 줄곧 ‘대등한 한미관계’를 역설해 왔지만 실제 외교 현장에서 부닥치는 한미관계는 이처럼 대등하지 않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과 주한 미국 대사관을 빙 둘러친 ‘비자 행렬’을 비롯해 불평등의 현장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미국과 말 그대로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능력도 없으면서 말로만 ‘대등한 한미관계’, ‘동북아균형자론’ 등을 내세우는 것은 공연히 미국 내 반한 감정이나 부추길 뿐이다.

한미 관계의 불평등을 좀 더 해소하고 싶다면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를 외교 기조로 삼아 내실을 기해 온 중국처럼 ‘조용히’ 국력을 키우면 된다. 국력만이 통하는 국제사회에서 말만 앞세우면 ‘실없는 나라’ 취급 받기 십상이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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