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그까이꺼 뭐 대충’의 逆說

  • 입력 2005년 9월 2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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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까이꺼 뭐 대충’이 올해의 유행어다.

개그맨 장동민이 KBS 2TV ‘개그 콘서트’에서 쓴 이 말은 실제로는 대충 살 수 없는 한국 사회에 대한 조롱이다. 장동민은 “어릴 적 아버지한테 들은 말”이라며 “당신의 참뜻은 스트레스 받지 말고 서로 믿고 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트럭 운전을 하는 아버지 장광순 씨는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며 남을 믿었다가 사기를 3번 당했다고 한다.

대충의 사전 풀이는 중의적이다. ‘일이나 행동을 적당히 하는 모양’이라는 뜻이 먼저 쓰이지만 ‘중요한 부분만 간단하게’라는 의미도 있다. 장동민이 제 구실 못하는 국회의원을 향해 TV에서 “그까이꺼 뭐 대충 국회에서 멱살 잡고 싸움박질이나 하면 되는 거 아녀”라고 꼬집은 대목도 핵심을 간략하게 전달하는 힘이 있다.

지난해 ‘인생을 단순하게 사는 대충형 인간’이라는 책이 나온 적 있다. ‘아침형 인간’ 등 치밀하고 완벽한 인간형이 주목받을 때 상반된 콘셉트를 제시해 3000여 권이 팔렸다. 이 책을 낸 출판사 큰나무의 한익수 사장은 “원제가 ‘단순 경영(einfach managen)’이었으나 우리 사회의 경쟁이나 불신 스트레스를 감안해 ‘대충형 인간’으로 번역했는데 반응이 괜찮았다”고 말했다. 책은 히트하지 못했으나 우리 사회가 ‘대충’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을 보여 줬다.

이 책의 저자는 독일의 세계적 할인점 ‘알디’의 임원을 지낸 디터 브란데스 씨. 그는 대충형 인간과 완벽형 인간을 비교했다. 완벽형 인간은 완벽을 추구하다가 사안의 복잡성을 증가시켜 혼돈으로 몰아넣는다고 한다. 반면 대충형 인간은 믿음을 토대로 사안을 단순화하고 관료주의를 뛰어넘는다. 불신이 팽배한 조직이 소수에만 의존하거나 복잡한 규정과 절차 탓에 경쟁력을 잃는 문제를 ‘대충형 인간’을 통해 지적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대충형 사회’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회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전제로 한 사회계약설을 뒤집어 보면 그의 분석은 설득력 있다. 계약이 서구 합리주의의 상징이라고 하지만 인간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됐고, 그런 근대의 유산이 여전히 유효한 현대에서도 불신은 증폭되고 있다. 개인의 신상이나 금융 거래를 낱낱이 파악하려는 국가의 정보화 정책도 불신을 깔고 있고, 개인끼리 계약할 때 복잡한 조항들을 대충 넘겼다간 낭패 보기 십상이다.

지난해 한때 일본에서도 ‘대충형 인간의 요리술’이라는 책이 나와 ‘대충형 인간(즈보라 닌겐·ずぼら 人間)’ 바람이 불었다. 간편 조리술을 담은 책으로 100만여 권이 팔리면서 ‘대충형 인간’ 기사들도 나왔다. ‘즈보라’는 흐리멍덩하다는 뜻인데 매사에 꼼꼼한 일본인들도 대충의 매력에 솔깃했던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대충 살자고는 할 수 없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 최근 숙명여대 강연에서 “(선진국 진입에 대해) 그까이꺼 대충 이대로 가면 되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건 아니다”고 해 웃음을 자아냈다. ‘건성으로’ 가면 안 된다는 뜻이지만, 그래도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대충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싶다. 장광순 씨처럼 “그까이꺼 뭐 대충” 하며 서로 믿는 사회 말이다. 대충은 완벽보다 인간답다.

허엽 위크엔드 팀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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