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 칼럼]경제실정보다 더 심각한 것은

  • 입력 2005년 9월 20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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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인천은 아마도 55년 전 함포사격 속의 9·15 상륙작전 이후 가장 소란스러웠을 것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를 놓고 벌어진 소동은 다시 한번 세계의 시선을 이 도시에 집중시켰고, 자랑스러운 인천상륙작전의 현장을 한심한 뉴스의 현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 역사를 보면 외부의 침입으로 스러지기 직전의 나라를 기적적으로 구해낸 영웅이 둘이 있다. 한 사람은 한국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외국인이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를 물리친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일찌감치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터이고 많은 우리 국민은 2차대전 때 황국신민(皇國臣民·일본 국민)으로 참전했다가 만주 벌판이나 태평양 한가운데서 전사해 야스쿠니신사에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임란 때의 구국 영웅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오늘날 서울 종로구 세종로 한복판에 서서 이 나라의 혼란스러운 현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6·25전쟁 때 김일성 군대를 격퇴한 맥아더 장군이 아니었다면 지도상의 우리나라는 지금 붉게 칠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국민은 오늘날 북한에 식량을 원조하기는커녕 외국에서 구걸해 온 식량으로 연명하면서 ‘위대하신 영도자’를 열렬히 찬양하는 광신도나 됐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구원한 후 ‘사라진 노병’은 1957년 9월 15일, 인천시민의 헌금으로 자유공원에 동상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48년 동안 국민적 사랑과 존경 속에 인천 앞바다를 지켜보고 서 있다.

한국인의 눈으로가 아니라 객관적, 역사적 관점에서도 그는 세계 전사에 길이 남을 거인이다. 친북반미세력이 동상을 철거하더라도 맥아더 장군의 명성에 흠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동상 건립 헌금을 냈거나 그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 찍고 감사와 사랑을 표해 온 수많은 인천시민, 그리고 동상 건립에 뜻을 같이했던 수천만 국민의 인격을 모욕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저들은 맥아더 장군이 양민을 학살한 전쟁광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엄청난 규모의 인민군을 동원해 수십만 우리 양민과 국군 그리고 유엔군을 죽이고, 엄동설한의 1·4후퇴 때 그 많은 피란민에게 죽을 고생을 안겨 준 장본인은 따로 있다. 바로 우리나라 국가원수가 2003년 중국 방문길에 중국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두 사람 중 하나로 꼽은 마오쩌둥(毛澤東)이다. 개인으로서야 마오쩌둥을 존경하든 스탈린을 존경하든 자유다. 그러나 수많은 우리 군과 민간인의 생명을 앗아간 장본인을 대통령이 존경한다고 공개한 것은 동상 철거론자들처럼 수상한 세력들에게는 응원가로 들렸을 것이다.

왜 참여정부 들어 맥아더 장군 동상이 새삼 이슈가 되어야 하는가. 분명한 것은 본질도 아니고 근거도 없는 기록을 들고 나와 동상 철거를 논쟁거리로 만든 자체가 우리 사회의 위험 신호라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당국자들이 동상 철거 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언급한 이유는 야릇하다. 즉 ‘이 나라를 구해 준 위인을 계속 기리기 위해 동상 철거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자존심이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악화시킬 수 있는 일”이고 “역사로서 존중하고 나쁜 건 나쁜 대로, 좋은 건 좋은 대로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 그 이유들이다. ‘나쁜 역사’란 무슨 뜻인가.

이 정부는 집권 이후 특정 계층과 특정 지역을 적대시해 왔지만 북한정권과 반미친북단체에는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다. 동상철거 주장도 캐보면 정부의 그 같은 태도에서 뿌리내렸을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 2차대전에서 맥아더 장군에게 항복해 치욕의 미군정 통치를 받았던 일본은 요즘 미국과 더욱 가까워지고 있는 반면 한미관계는 최근 미 의회가 맥아더 장군을 모욕하지 말고 동상을 보내라고 할 만큼 한층 소원해지고 있다.

현 정권의 이런 태도와 역사인식은 개별적인 경제정책의 실정이나 오류들보다 훨씬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경제에 끼칠 가능성이 크다. 기업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가치와 창출한 자산이 정권과 사회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할 때에만 투자에 나서는 속성이 있다. 당당하게 가면을 벗어던지고 ‘세상을 바꾸자’며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게 된 세태는 국가경제 차원에서도 보통 걱정거리가 아니다. 진짜 ‘나쁜 역사’는 지금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이규민 경제大記者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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