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함정임]희망까지 중절수술할 셈인가

  • 입력 2005년 9월 15일 03시 12분


코멘트
한때 나는 아이 낳기를 권하는 사람이었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우아한 싱글을 고집하는 후배들에게 “아이를 낳기 위해서라도 어서 결혼하라”고 자극했고, 한 아이를 낳은 후배나 동료들에게는 “빨리 둘째를 낳으라, 가능하면 셋째까지 낳으라”고 강권했다. 출산 전도사가 따로 없었다. 그들의 손을 덥석 잡아 뜻을 전하고 돌아설 때엔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웃음이 비어져 나오곤 했다. 내가 뭘 믿고 이러나. 아니, 어떻게 책임지려고 이러나!

나는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세 살까지 나에게 젖을 주셨고, 언니는 나를 업어 키웠다. 마당의 꽃들과 조약돌이 벗이 돼 주었고, 오빠의 교과서와 지도가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다. 1960년대 베이비붐 세대인 나는 길에서나 교실에서나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를 보고 살았다. 20년에 걸친 ‘산아 제한’ 정책의 결과로 저출산 시대에 접어들 무렵, 한 아이를 낳았다.

내 아이가 자라는 현실은 30년 전과는 현격히 달라졌다. 뛰어놀 마당도, 벗이 돼 줄 꽃과 조약돌도 없었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후배와 동료에게 어서 아이를 낳으라고, 셋까지 낳으면 더 좋다고 큰소리칠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릴 적, 마당의 꽃과 조약돌, 하늘의 구름을 벗 삼아 뛰놀던 그 시절 어디선가 들려오는, 강력한 하나의 소리가 있었다.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묻기 전에 내가 자라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사명은 아이를 낳고부터는 아이를, 그러니까 인간, 곧 ‘인간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로 전이되었다. 혈혈단신 외아들을 낳아 키우면서 새록새록 뼈저리게 느낀 결과였다. 치명적인 사정이 아니라면, 아이를 세상에 내놓고 혼자 자라게 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라는 충격적인 보도가 있었다. 하루 평균 1301명이 태어나는가 하면 960명은 임신중절로 빛을 못 보고 죽어간다고 한다. 기혼 여성의 10명 중 4명이 낙태 경험이 있고, 전라도에서는 하루 사망자 수가 하루 출생자 수를 앞선 것으로 나왔다. 열악한 육아 환경, 비인간적인 교육 풍토, 우리의 식단을 장악한 정체불명의 식재료들을 보면 아이를 낳아 건강하게 키우려는 의지는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만큼이나 무력해 보인다. 이쯤 되면 출산 기피의 원인이 국가에 있느냐 개인에게 있느냐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프랑스와 스웨덴 같은 선진국의 인구분포도로 보았던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최접점에 우리는 서 있다. 국가 경계가 희미해져 가는 만큼 삶의 경계, 그러니까 가족의 형태 또한 새로운 실험 단계에 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국가 체제나 가족의 삶에 있어서 오랜 실험을 거쳐 온 프랑스나 스웨덴의 현재의 경우다. 예전 핵가족, 계약 동거, 독신 가족의 대명사로 불렸던 프랑스는 연어의 회귀처럼 벌써 오래전에 가족 회귀, 그러니까 적어도 둘 이상의 자녀를 삶의 최대 행복으로 추구하는 안정적 가족생활을 구현하고 있다. 유럽의 최빈곤국이었던 아일랜드는 오랜 세월 그들을 침략하고 지배했던 잉글랜드를 능가하기 시작했는데, 들여다보면 아일랜드 경제 인구의 70%가 30대의 젊은 피로 이뤄져 있다.

새 생명의 울음소리, 웃음소리가 사라진 세계를 생각해 보라! 기다리는 것은 자멸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 아이를 타국으로 떠나보내기 전에, 가족을 짐 보따리처럼 끌고 이민을 꿈꾸기 전에 내 몸, 내 나라를 되살릴 뜨거운 피를 느껴 볼 일이다.

함정임 소설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