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오명철]재미동포 이미한 양

  • 입력 2005년 4월 22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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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문학, 그림, 영화 등으로 수없이 다뤄졌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 같은 홀로코스트 영화에서부터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희극적 비극’의 부성(父性) 영화까지. 그러나 한국의 국토는 물론이고 말과 글까지 말살하려 했던 일제(日帝) 만행은 세계에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재미동포 이미한(17) 양이 진외조부인 국어학자 건재 정인승(健齋 鄭寅承·1897∼1986) 선생을 기리며 쓴 짧은 에세이 한 편이 미국을 감동시켰다. 그제 링컨기념관 개관 행사 중에 이 양이 낭독한 이 에세이는 5400 대 1의 경쟁 끝에 뽑힌 글이다. 이 양은 일제강점기 한글사전을 편찬하다 옥고를 치른 건재 선생을 추억하면서 썼다. “그분은 개인의 사상을 형성하고 교감하는 매개인 언어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은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믿으셨다. …21세기의 자유란 나이 인종 성별 신분을 막론해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고유 언어로 표현하고, 그 고유 언어로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개개인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이어 등단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자유사회의 삶에 대해 유려하게 표현해 준 이 양에게 특별한 감사를 보낸다”고 말했다. 이 양은 “주제는 ‘링컨과 새로운 자유의 탄생’이었지만 자유라는 큰 주제를 떠올리면서 진외조부가 나에게 준 영감(靈感)을 썼다”고 말했다. 빼앗긴 나라말을 되찾기 위해 고초를 감수한 건재 선생의 집념이 이국땅에서 태어난 증손녀에게 대(代)를 이어 전해진 것은 신비(神秘)다.

▷외국에 장기체류해 본 사람은 모국어로 말하고 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의 말과 글까지 침탈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일제의 ‘우리말 빼앗기’는 가장 혹독한 침략행위로 인류 문명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 양은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 에세이 낭독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살아 있는 역사’로 떠올렸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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