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28년 기타 거장 세고비아 출생

  • 입력 2005년 2월 16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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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볍고 빠르고 기하학적인 정확성으로 날아다녔다.”

뉴욕타임스는 1928년 처음 미국 무대를 밟은 안드레스 세고비아(1893∼1987)를 ‘꿈꾸는 학자’에 비유했다. 기타가 ‘하급악기’로 취급받던 시절에 세고비아는 예술적 향기 가득한 연주로 비평가들을 사로잡았다.

기타 음악은 세고비아로 인해 하나의 예술로서 지위를 갖추게 됐다. 그의 손에 의해 기타는 ‘술집이나 카페에서 흥을 돋우는 오락악기’에서 ‘콘서트 무대에서 피아노, 바이올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전악기’로 승격됐다.

그는 고독한 기타맨이었다. 그는 혼자 기타를 배웠고, 혼자 연주 레퍼토리를 만들었다. 1893년 2월 17일 스페인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6세 때 처음 기타를 접한 뒤 미련 없이 피아노와 첼로를 포기했다. 부모의 반대 속에 정식 기타레슨을 받을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이 선생이었고 학생이었다. 오늘날 기타학도들 사이에 ‘바이블’로 통하는 세고비아 운지법(運指法)은 독학의 산물이었다.

그는 기타의 치명적 약점인 작은 음량을 극복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손톱 아래 살과 손톱을 동시에 현에 튕기는 주법을 연마해 기타의 음색이 먼 곳까지 도달하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소리를 증폭시킬 수 있는 기타 목재와 디자인 개발에도 힘썼다.

그는 탁월한 연주가인 동시에 편곡자였다. 연주 초기 그는 늘 레퍼토리 부족에 시달렸다. 클래식 작곡가들은 기타용 작품을 거의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르네상스, 바로크시대에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곡가들이 만든 피아노, 바이올린, 심지어 오케스트라용 작품들을 원곡의 음악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타 음악으로 재생했다. 1960, 70년대 최고 전성기 시절 그의 레퍼토리는 300여 곡에 이르렀다.

그는 20세기 후반 전 세계적으로 기타가 하나의 문화코드이자 산업으로 발전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70, 80년대 우리나라에도 세고비아 기타연주가 본격 소개되면서 기타는 젊은이들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당시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은 아마 기억할 것이다. 세고비아의 손끝을 타고 흐르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애잔한 선율을….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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