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유홍림]‘선진 한국’의 정치적 조건

  • 입력 2005년 1월 20일 18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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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정치 구호는 선진화다. 여야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의 희망이 담긴 목표다. 성장과 분배, 안정과 개혁을 둘러싼 분란을 뒤로하고 경제 활성화와 동반 성장을 통해 선진국으로 나가자는 각오가 새롭다. 목표 설정은 정치의 중요한 기능이다. 국민은 민생과 경제 살리기를 요구했고, 정부와 정치권은 이에 부응하는 목표 제시를 위해 고심해 왔다.

연두의 신년사나 기자회견은 정치과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의례’다. 이제 의례적 행사는 끝나고 구체적 행동을 기다리는 현실이 앞에 있다. 과연 선진 한국을 위해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선진화는 정치권과 정부만의 일은 아니다. 모든 국민이 각 영역에서 자발적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개인이나 조직의 노력이 항상 전체의 이익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개인의 의도를 넘어선 합리성과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정치는 무릇 이러한 합리성과 질서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해야 한다. 자칫 정치인이나 관료가 시장 속의 개인과 마찬가지로 자신과 조직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든가 또는 전체 차원의 질서를 조작 가능한 ‘인위적 질서’로 인식하고 섣부르게 틀에 맞추려 한다면 공공이익은 결코 실현될 수 없다.

▼인식과 자세의 중요성▼

따라서 정치인과 정부 관료의 인식과 자세가 중요하다. 몇 가지만 짚어 보자. 첫째, 목표설정은 의례적 행위임을 자각해야 한다. 목표를 앞세우고 달리는 ‘작위(作爲)의 정치’에 빠져들면 선전과 조작, 구호와 이미지에 조급하게 매달리게 된다. 목표 설정의 주체는 궁극적으로 시민이다. 민주 정치과정은 시민의 요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창출’ 또는 ‘관리’보다 ‘지원’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사회 각 부문의 활력과 창의성이 극대화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정부의 의욕이 앞서면 많은 경우 사회의 활력은 시들어 버린다. 정치 과잉으로 인한 ‘소용돌이 현상’은 자율성을 해치고 획일주의의 폐해를 낳기 때문이다.

둘째, 위로부터의 정책기획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성공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오래 유지될 수 있는 제도의 형성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선진적 제도는 위로부터 부과되지 않는다. 시민들 스스로 행위에 대한 반성을 통해 공공이익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 인식이 공공정신으로 승화되면서 비로소 의미 있는 제도가 만들어진다. 제도란 어렵게 형성되지만 쉽게 사라지는 공공정신을 어느 정도 유지시키는 틀이다.

제도 형성의 과정을 거꾸로 생각하는 데 익숙한 정치인과 관료는 위로부터의 제도 개혁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거나 이끌려고 한다. 그러나 실효성 있는 정책이나 제도를 위해서는 사람들이 경험을 반추하면서 어렴풋하게나마 가지게 된 공통 인식을 우선 살펴야 한다. 예컨대 실물경제의 주체들이 공유하는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교육 현장에서 교사와 학생이 느끼고 있는 고충과 답답함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찾아낸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섬세함이 경제정책과 교육제도를 성공으로 이끈다.

▼합리적 사회를 향하여▼

셋째, 작은 일이 중요하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아주 적지만 수당을 지급하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공공업무를 지탱하는 공공정신이 부지불식중에 잠식됐기 때문이다. 작은 변화에도 신중해야 한다. 위대한 정치철학자 플라톤은 아이들의 장난감 선택이나 노래의 템포에도 신중함을 보였다. 질서는 사소한 습관에서 비롯되며, 신뢰는 작은 일로부터 축적된다. 거창한 플랜이 ‘거대한 사회’를 조장할 수는 있지만, 축적된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성숙한 사회’를 만들지는 못한다.

결국 선진 한국의 모습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합리적 사회’일 것이다. 꿈은 개인의 영역이다. 함께 취할 수는 있어도 같은 꿈을 꿀 수는 없다. 다양한 꿈을 인정하는 합리적 사회가 선진국의 모습이다. 억지보다 자연스러움이 질서의 기본이 되는 사회가 합리적인 자유민주주의 사회다. 이제 구호와 이미지, 동원(動員)의 정치에서 벗어나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유홍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정치학 honglim@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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