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27>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2월 8일 19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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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서문 문루에 있던 한신이 놀라 서쪽을 바라보니 다시 소성 쪽에서 흙먼지가 자우룩하게 일며 한 떼의 인마가 몰려오고 있었다. 한눈으로 보아도 조금 전 패왕이 이끌고 온 군사보다 훨씬 많은 듯했다. 바로 소성 백성 몇만에게 초나라의 기치와 창검을 들려 끌고 온 의병(疑兵)이었다.

하지만 겁먹은 군사들뿐만 아니라 대장군 한신까지도 새로 이른 초군의 실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패왕이 이끌고 온 것보다 훨씬 많은 초나라 대군이 뒤따라 온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패왕의 중군 뒤로 이어지자 팽성 안의 한군은 갑자기 자신들이 넓고 거센 초나라 대군의 물결 속에 갇힌 외로운 섬처럼 느껴졌다.

“쳐라! 이번에는 반드시 서문을 깨뜨려야 한다.”

의병에 속아 한군이 기죽어하는 걸 보고 패왕이 다시 그렇게 명을 내렸다. 그 명에 초나라 군사들의 두 번째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더 급박하고 맹렬했다. 그 바람에 한신은 군사를 갈라 북문으로 보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힘을 다해 초군의 공격을 막았다.

한신이 장졸들을 다잡아 간신히 패왕의 두 번째 공세를 막아냈을 때 다시 맹렬한 타격과도 같은 급보가 북문 쪽에서 날아들었다.

“북쪽으로 또 한 갈래의 초나라 군사가 달려와 종리매를 돕고 있습니다. 앞선 장수가 스스로 외치기는 초장 환초(桓楚)라 하는데 계포와 범증이 보낸 원병이라 합니다. 종리매 하나만으로도 위태롭던 북문은 이제 시각을 다투고 있습니다. 어서 구원을 보내 주십시오.”

이 말을 듣자 한신마저 맥이 쭉 빠졌다. 한왕과 한군은 팽성이란 거대한 덫에 걸린 지도 모른다고 줄곧 의심해 온 것이 이제는 쓰라린 실감으로 다가왔다. 한신이 은근히 바란 대로 팽성이 떨어졌다는 소문에 불끈한 항우가 되는 대로 긁어모은 군사 약간을 이끌고 밤낮없이 달려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항우는 기세와 용력만의 싸움을 하고 있지 않다. 범증과 계포를 남겨 초나라의 대군을 다치지 않고 차례로 제나라에서 빼내게 한 뒤, 자신은 먼저 달려와 우리 한군의 퇴로부터 끊었다. 그리고 저희 대군이 이르기를 기다려 팽성을 에워싸고 독안에 든 쥐 꼴이 난 한군을 섬멸하려 한다. 비어 있는 동문과 남문은 모두 초나라 땅 한가운데로 나 있다. 서북이 막혀있는 한 그리로 빠져나가도 관중으로 돌아갈 길은 없다. 앞서 있었던 두 번의 공격이 겉보기보다 느슨했던 것은 그 꾀하는 바가 우리를 성안에 가둬놓으려 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나 항우가 기다리는 것은 초나라의 전력이 팽성 북문에 집중되는 때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우리는 빠져나가려 해도 빠져나갈 수가 없다……)

마침내 그렇게 헤아린 한신은 부장 하나를 불러 한왕이 있는 곳으로 보내며 말했다.

“가서 태복(太僕) 하후영과 자방(子房) 선생께 내 말을 전해라. 지금은 팽성을 빠져나가는 일이 급하니, 어서 대왕을 모시고 적이 없는 남문으로 빠져나가시라고. 성을 나가면 남쪽으로 머지않은 곳에 높고 깊지는 않으나 잠시 의지할 만한 산세가 펼쳐질 것이니 거기서 기다리시라고. 그러면 내 적의 추격을 뿌리치고 우리 대군을 수습하는 대로 그리 달려가 대왕을 모실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날랜 이졸 하나를 불러 북문으로 보내며 일렀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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