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319…명멸(明滅)(25)

  • 입력 2003년 5월 19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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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들을 안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아이들이 자리하고 있고 오줌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내는 시장을 보러 나갔는지 집에 없었다 큰아들은 나무토막으로 자동차 놀이를 하고 있고 큰딸은 아래 남동생을 업고 빨래를 개고 있고 작은딸도 언니를 흉내 내어 베개를 업고 빨래를 개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의 발에 걸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이 아는 너거들 동생이다 오늘부터 같이 살게 됐다 신명아 너는 나이도 비슷하고 사내아이니까 사이좋게 잘 놀아줘야 한다 전처가 낳은 딸과 새 아내가 낳은 아들이 원숭이처럼 내 목에 두 팔을 휘감고 긴장하고 있는 남자아이를 보았다 작은딸이 다가와 매끈한 이마를 들고 물었다 이름이 뭐꼬? 아들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대신 대답했다 신철이다 그 다음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하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내내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들 잘 들어라 앞으로는 오빠 언니 형 누나 카고 부르지 마라 너거들 학교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대답한다 아이가 구니모토 노부아키 구니모토 노부테쓰 구니모토 노부요시 구니모토 다마미 구니모토 노부코 가족들끼리 진짜 이름을 안 불러주면 누가 불러주겠노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이씨란 성은 일본사람한테 빼앗겼다 너거들한테 남은 것은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뿐이다 이름은 소리 내서 불러주지 않으면 죽어버린다

세 여자가 낳은 다섯 자식의 까만 눈동자 열 개가 똑바로 나를 쳐다보았다 보이고 있다는 감각이 온몸을 관통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몸서리쳤다 내 눈은 지금 어떤 빛을 띠고 있을까?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을 속속 드러낸 채 시선을 되받아야 했다 말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어버이로서 진정 내 자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 나는 바짝 마른 입을 벌리고 푸석푸석한 혀를 움직여 살아 있는 다섯 자식의 이름과 죽은 두 자식의 이름을 불렀다 신태야! 신명아! 신철아! 신호야! 미옥아! 자옥아! 신자야!

1943년 5월15일 애투 섬에서 격전

<대본영 발표> 5월12일 유력한 미군 부대는 알루샨 열도 ‘애투 섬’에 상륙을 개시했다. 섬을 수비하고 있던 우리 부대는 이를 격퇴하기 위해 목하 격전 중에 있다.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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