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번역어성립사정'…'LOVE'를 왜 '연애'로 번역했을까

  • 입력 2003년 4월 4일 18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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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유럽 국가 중 특히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통해 서양의 사상과 문물을 접했으며 네덜란드어의 번역을 통해 많은 새로운 어휘를 창조했다. 네덜란드 상관(商館)이 있던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出島) 부근에 네덜란드 국기를 단 상선이 항해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일본 그림.동아일보 자료사진
일본은 유럽 국가 중 특히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통해 서양의 사상과 문물을 접했으며 네덜란드어의 번역을 통해 많은 새로운 어휘를 창조했다. 네덜란드 상관(商館)이 있던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出島) 부근에 네덜란드 국기를 단 상선이 항해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일본 그림.동아일보 자료사진
◇번역어성립사정/야나부 아키라(柳父章) 지음 서혜영 옮김/208쪽 1만원 일빛

중국에 서양을 전한 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이었지만 선교사도 없이 서양문화를 받아들였던 조선에서 그 역할을 했던 것은 문자로 된 책이었다. ‘서양’이라는 문화는 한자어라는 번역어를 통해 조선에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조선보다 먼저 적극적으로 서양을 받아들였던 중국과 일본의 번역어는 거의 그대로 조선에 유입되어 상당수가 ‘현대 한국어’로 자리잡았다.

사회, 개인, 근대, 미(美), 연애, 존재, 자연, 권리, 자유, 그 또는 그녀. 일본 모모야마가쿠엔(桃山學院)대 교수인 저자는 서양어의 번역어인 이 10가지 개념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일본어로 자리잡게 됐는지 추적했다.

이것은 이질적인 언어가 현지의 언어와 공존하게 되는 과정을 파헤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문화의 수용 방식에 대한 흥미 있는 문화사적 탐구이기도 하다.

예컨대, ‘society’와 ‘individual’은 뗄 수 없을 만큼 서로 대비되는 서양 근대의 개념이다. 그런데 사실상 ‘society’도 ‘individual’도 없었던 20세기 초의 일본에서 두 개념의 번역어를 찾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개념의 이해 없이는 서양의 근대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번역어를 ‘만들어’ 냈다.

‘society’의 번역어로는 ‘인간교제’처럼 기존에 사용되던 개념을 결합시켜 만든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모임을 뜻하는 ‘사(社)’와 ‘회(會)’를 결합한 신조어가 살아남았다. 일본의 현실을 반영한 기존 용어와의 혼동을 피한 신조어의 승리였다.

‘individual’은 ‘society’와 대비되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일신(一身)’, ‘일개인(一個人)’, ‘인민각개(人民各箇)’ 등의 번역어가 사용되다가 ‘일개인’으로 수렴되는 듯했다. 하지만 결국은 거추장스러운 ‘일(一)’을 떼어버린 ‘개인’만 남게 됐다.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modern’이란 개념의 혼란은 그 개념의 수용기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20세기 초에 일본의 한 평론가는 “내가 느끼는 ‘근대’란 근래 십수년 동안 경험한 혼란 그 자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다른 평론가는 “서양의 ‘근대’란 것은 어쨌든 일본인의 눈에는 뭔가 매우 위대한 듯이 비쳤다”라고 이야기했다. 당시 근대란 ‘혼란 그 자체’인 동시에 ‘뭔가 매우 위대한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근세(近世)’란 번역어를 능가하며 유행처럼 번진 ‘근대(近代)’는 당시 일본사회에서 전형적으로 ‘실체 없이 존재하는 용어’였다. 하지만 근대적 사회의 형성과 함께 그 의미를 하나하나 획득해 갔다.

서양의 ‘Love’는 일본의 전통이나 현실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막연한 개념의 번역어를 찾던 사람들은 ‘연(戀)’이라는 개념을 찾기는 했지만 ‘천박한’ 연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사용을 꺼려하기도 했다. 그런데 서양의 낭만적 ‘Love’를 동경하던 젊은이들 사이에서 ‘연애(戀愛)’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이 용어가 번역어로 자리잡아 갔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의 현실에 없는 이상으로서의 ‘연애’였고, 이는 번역어의 숙명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런 용어들을 지금도 수없이 사용하고 있는 우리 한국인의 경우에 저자가 집요하게 파헤치는 근대 번역어들의 문화사는 정확한 언어의 사용과 이해를 위해 도움이 된다. 하지만 서양문화의 상당부분을 일본을 통해 받아들여야 했던 한국 현대사의 불행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기도 하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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