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승헌/갈길 먼 ‘토론공화국’

  • 입력 2003년 1월 30일 17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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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오전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전국순회토론회’. 현장에 직접 참석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는 참석자들의 ‘민원성’ 질문이 30여분 이어지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결국 한 참석자가 또 다른 민원을 주문하려는 순간, 노 당선자는 마이크를 빼앗아 “그 정도로 마감하자. 쟁점을 깊이 파고들어 가는 토론이 되기 어렵다”며 질문을 도중에 끊었다.

이날 오후 토론회에 곁들여 마련된 부산 경남 지역 상공인과의 간담회에서도 “김해공항을 넓혀달라”는 등의 민원이 쏟아지자 노 당선자는 “잘 알겠습니다, 알겠고요. 그런데 의견과 해답보다는 (민원성) 질문이 많네요”라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처럼 27일부터 대구를 시작으로 광주 부산으로 이어진 노 당선자의 ‘전국 순회 토론회’는 당초 취지와 달리 민원의 장(場)으로 변질된 느낌이다. 참석자들은 “선거 유세 때 약속하지 않았느냐”며 노 당선자를 압박하고, 노 당선자는 민원내용과 관계없이 자신의 ‘지방 분권화 전략’을 전달하는 ‘서로 비켜가는 토론’이 판박이처럼 반복된 것이다.

이렇다 보니 지금까지 노 당선자가 각 지방에서 쏟아낸 발언도 특별히 지역사정과는 관계없는 원칙론적인 내용 일변도였고 자연히 지역관계자들로부터 불만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28일 광주 토론회에 참석했던 한 지역 인사는 “지역 현안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지 누가 ‘지방분권학 특강’을 들으러 왔나”라고 불만을 내비쳤다.

이런 상황은 노 당선자가 “모든 정책을 토론을 통해 만들겠다”며 내건 ‘토론 공화국’이 현실 속에서는 쉽게 가시화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5번이나 더 남아있는 전국 순회 토론회의 파행 운영을 보완할 묘책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점. 노 당선자의 한 측근도 “토론회의 소제목이 ‘민(民)에게 듣는다’인데 민원만 듣고 있다”며 “자칫 이상과 현실을 조율하지 못해 당선자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려울 것 같아 걱정이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승헌기자 정치부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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