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윤종구/˝언론을 스크린해달라˝

  • 입력 2002년 12월 31일 17시 19분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의 한 핵심측근은 대선 전 “우리는 팩트(fact·사실)가 틀리지 않으면 기사를 고쳐달라고 하지 않는다. 해석은 언론 몫이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언론 고유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노 당선자측은 이런 원칙을 비교적 충실히 지켰다.

그러나 최근 노 당선자측의 언론관에 변화가 엿보이고 있다. ‘인수위 신문’ 발간 계획이 대표적인 징후다. 명분은 노 당선자의 발언이 곡해될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라지만, “인수위 관련 기사 중 중요한 것이 간과되거나 악의적인 것은 없는지 스크린해달라”는 노 당선자의 발언은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인수위 신문’이 본의와는 달리 권력이 언론에 ‘보도 기준’을 제시하는 장치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다.

지난해 12월30일 계룡대 3군본부를 방문한 노 당선자가 “주한미군 감축에 대비해야 한다”고 발언한 이후 노 당선자측은 “없었던 것으로 해달라”고 여러 차례 강력히 주문했다. ‘인수위 신문’이라면 필시 그 부분을 뺐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요청을 언론이 들어주지 않은 것도 ‘곡해’일까. 뿐만 아니다. 대선기간 중 노 후보측은 행정수도 이전 공약과 관련, “돈 안되고 시끄러운 것만 충청도에 보내자”고 한 노 후보의 인천 발언에 대해서도 “그런 말 한 적 없다”거나 “진의가 왜곡됐다”고 주장했다. 인터뷰 기사가 나간 후 ‘팩트’를 고쳐달라고 요구 해온 적도 있다.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부분은 크게 쓰고, 원하지 않는 것은 가려줘야 ‘곡해하지 않는 언론’일까.

정확한 팩트에 근거한 것이라면 언론사마다 다양한 시각과 가치기준을 갖고 보도할 수 있는 것이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언론들이 획일적인 보도로 일관한 때가 있었고, 그 폐해는 정권이나 언론 모두에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느 한쪽의 강요와 그에 대한 반발이 되풀이되는 곳에서 바람직한 권-언 관계가 싹트기는 어렵다. 권력과 언론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 했다. 노 당선자는 이를 “정치는 정치의 길로 가면 되고, 언론은 언론의 길을 가면 된다”고 표현해 왔다. 노 당선자와 그 주변인물들이 그 약속을 지켜주길 기대한다.

윤종구기자 정치부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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