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낮의 촛불'

  • 입력 2002년 12월 25일 19시 14분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언동은 종종 개그맨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만일 개그맨이 되어 TV토크쇼에 단골 출연했다면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시류를 타면서 때로는 정곡을 찌르는, 그리고 가끔은 인간의 은밀한 마성까지 건드리는 그 놀라운 식견과 풍자적 능력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을 거다. 대선이 끝난 뒤에도 JP의 빼어난 자질은 어김없이 빛을 발했다.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를 ‘낮의 촛불’이라 칭송한 것이다. 얼른 이해 못하는 이들을 위해 JP는 “밖에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밤이 되면 촛불이 주위를 밝히듯 제자리에 가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사람”이라고 친절한 해설까지 붙여줬다.

▷비극은 JP가 개그맨이 아니라 정치인이라는 데 있다. 그것도 보통 정치인이 아니라 ‘40년 정치사의 진정한 승자’로 일컬어지는 ‘영원한 2인자’다. 2인자라는 자리가 아무리 책임 없는 위치라고는 해도 결코 쉽다고는 할 수 없다. 너무 잘나면 보스의 눈 밖에 나고 또 못나면 아래로부터 치받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모신 대통령 가운데는 총성에 목숨을 앗긴 이도 있고 퇴임후 불행한 이도 있다. 그런데도 JP는 독야청청 건재하다. 어떤 이는 “JP가 권력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다보니 권력을 떠나서도 못살고 저항도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게 더 간단명료하지 않을까. “적시에 적절하게 처신한 덕이다.”

▷JP는 1992년 김영삼 대통령의 당선자 시절 그림자도 밟지 않겠다며 ‘그림자론’을 폈다. YS가 대통령이 되자 “연작(燕雀·제비와 참새)이 어찌 홍곡(鴻鵠·큰 기러기와 고니)의 큰 뜻을 알겠느냐”며 깍듯이 모셨다. 98년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자 시절에도 “40년간 죽을 고비를 다섯번이나 넘기고도 희망과 의지를 버리지 않은 분”이라며 ‘신그림자론’을 펼쳤다. 그 덕에 JP는 40년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이 대목에서 노 당선자가 아직 후보였던 때 JP는 “노동자가 이 나라의 주인이 돼야 한다고 떠드는 사람에게 우리 아들 딸의 내일을 맡길 수 없다”고 말한 걸 굳이 상기시킬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JP는 그렇게 살아왔으므로. 또 앞으로도 한참 동안을 그렇게 살고 싶을 것이므로.

▷현장의 ‘2030’ 개그맨들은 이제라도 늦지 않다. JP로부터 여러 가지 아이디어와 언어구사 능력을 배워 방송문화 발전을 앞당기기 바란다. 그리고 JP도 알아야 한다. 이제 3김시대는 종언을 고한다는 역사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리에 연연한다면, 그것도 꿈과 희생과 구원의 상징인 촛불을 끌어들이며 2인자 자리에 머무르려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촛불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을.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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