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정희/떳떳한 국정원이 되려면…

  • 입력 2002년 12월 3일 18시 38분


20여년 전 유학을 떠나 첫발을 디딘 곳이 미국 중서부에 위치한 캔자스시티 국제공항이었고 그곳에서 ‘KCIA’라 쓰인 간판을 보고 일순간 우리나라 중앙정보부를 떠올렸던 씁쓸한 추억이 있다. KCIA가 캔자스시티국제공항(Kansas City International Airport)의 약자인 것은 곧 알아차렸지만. 또한 그곳 대학의 캠퍼스에서 공공연히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의 충원을 위해 안내장을 나누어주던 CIA 홍보팀과 취업설명회에 서슴없이 참여하는 학생들을 보고 의아해 했던 기억도 새롭다. 그 뒤 우리나라의 정보기관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상당히 불식되었고, 요즈음 우리 대학 졸업생에게도 국가정보원은 인기 있는 직장이다.

▼대통령의 굳은 의지 절실▼

한편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중앙정보부는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거쳐 그 명칭을 두 번씩이나 바꿔 새롭게 태어나는가 했더니,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정권이 바뀌면 인사태풍이 몰아치는 힘 빠진 정보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침내 도청의혹으로 불거진 여야의 갈등은 국정원의 존폐 문제로까지 비화하고 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 모두 국정원의 대폭적인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구체적인 방안에서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으나, 공히 국정원의 국내 정치 관여를 종식시킨다는 내용이다. 이 후보는 불법도청을 정치관여 금지대상으로 하도록 국정원법을 개정하겠다고 언급했고, 노 후보는 국정원의 해외 및 대북 파트를 ‘해외정보처’로 바꾸고 수사파트는 분리해 별도 기구로 만들 생각인 듯하다.

그러나 국정원의 개혁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기 전에 국정원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근본 원인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역대 대통령들이 국정원이 국내정치를 위한 정보제공의 중요한 원천이라는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는 안기부법을 개정해 국가보안법의 불고지죄와 고무찬양죄에 대한 수사권을 폐지하는 한편 국회에 정보위원회를 신설해 문민통제를 강화했다. 김대중 정부 역시 국가권력기관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부(部)의 명칭을 국정원으로 바꿨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역시 통치권 행사를 위한 정보의 원천으로서 정보기관의 기능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정보가 곧 힘’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절실히 느끼는 순간 대통령은 정보의 독점을 통한 통치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즉, 국정원의 개혁을 위해서는 집권 후 대통령이 국정원의 막강한 정보력을 포기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선결 조건이다.

국정원의 조직을 개편하고 기능과 운용을 개혁하는 데 앞서 더 중요한 것은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을 확립하는 일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살생부가 나도는 국정원은 하나의 정치권력기관일 뿐 더 이상 국가의 안보와 관련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정보기관이 아니다. 국정원이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정원장 또한 정치적 행위를 삼가야 한다. 정부의 효율적인 외교 안보 군사 통상정책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 분석해 국가이익을 위한 정보의 생산을 총괄하는 국정원장은 정책 결정자도 아니고 더구나 정책 집행자도 아니다. 대북 관련 정보의 총책임자가 햇볕정책 전도사의 역할을 자임할 때 이미 대북 관련 정보는 정치화되고 왜곡될 수밖에 없다. 한 국가의 정보를 총괄하는 책임자가 정책집행의 현장에 직접 나서는 것을 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국민위한 기관' 거듭나야▼

이제 국정원 스스로 위상을 재정립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정원은 과거 억압적 폭력으로 민주인사를 탄압하던 조직도, 간첩사건을 조작하고 관제정당을 만들던 중앙정보부도 아니다. 그러나 아직도 집권자의 입맛에 맞는 정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도청을 하고 국내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면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음지에서 양지를 위해’ 일한다는 구호는 이미 지난 구호가 되어버렸지만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초심은 되살려야 한다. 국정원을 흔들려는 정치권에 자신 있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 떳떳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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