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영이/이에나가 교수가 남긴 것

  • 입력 2002년 12월 2일 18시 16분


“태평양전쟁 중 나는 그저 회오리바람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도 전쟁책임이다.”

지난달 29일 89세를 일기로 타계한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朗) 도쿄교육대(현 쓰쿠바대) 명예교수의 ‘역사 교과서 투쟁’은 마흔 살 전후 스스로의 역사 반성에서 시작됐다.

1913년 육군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도쿄대 국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태평양전쟁 당시 교단에서 제자들을 전장으로 보냈다. 일본의 천황제도나 전쟁상황에 대해 별 저항감도 없었다. 스스로를 보수적인 자유주의자라고 여겼다.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고민은 전쟁이 끝나고 문부성 요청으로 ‘나라의 발자취’라는 교과서 집필에 가담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침략행위를 ‘방조’한 자신의 책임에 눈뜨게 됐다. 그때까지 일본 역사교과서에는 아시아 침략행위에 대한 기술이 거의 없었다.

그는 1962년 고교 역사교과서 ‘신일본사’에 침략행위에 대한 기술을 넣었다. 문부성 검정 결과 불합격은 불 보듯 뻔했다. 이때부터 국가의 교과서 검정제도에 맞선 ‘이에나가 소송’이 전개된다. 처음엔 변호사들조차 재판성립이 안 된다며 말렸다.

‘교과서 검정은 학문이나 표현의 자유에 위배된다’는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법정투쟁이 결실을 맺는 데까지는 첫 소송으로부터 32년이나 걸렸다. 83년 문부성이 그에게 ‘난징대학살’ ‘731부대’ 등 일본의 가해사실 4곳을 삭제하라고 요구하자 이듬해 소송을 제기, 97년 “기술 삭제 요구는 위법”이라는 일부 승소판결을 받아냈다. 반평생에 걸친 그의 법정싸움은 단순히 한 권의 역사교과서 검정합격문제가 아니라 전후 역사교육 자체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법정에는 교육, 역사, 헌법학자가 대거 증인으로 출석했고 곳곳에서 학부모 모임이 생겨 고 대규모 교육운동으로 이어졌다.

집념 어린 투쟁 덕분에 일본 교과서는 어느 정도 제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됐지만 역사왜곡 문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지난해 왜곡 역사교과서 파문 때 그는 “전쟁 당시 거짓 교과서 때문에 몇천만의 국민과 이웃나라 백성들이 참사했는지 아는가”라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는 갔지만 제2, 제3의 ‘이에나가’의 출현을 기대한다.

도쿄=이영이특파원 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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