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윤종구/의원 민원에 발목잡힌 예산

  • 입력 2001년 12월 16일 18시 41분


110조원에 이르는 내년도 예산안 심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법정처리시한인 12월2일을 넘긴 채 언제 처리될지 모르는 상태로 기약 없이 표류하고 있다. 여야는 예산안 처리 지연에 대한 비판 여론을 의식해 정기국회가 마감되자마자 부랴부랴 11일 임시국회를 소집했지만 여전히 허송세월만 하고 있다.

예산안을 실질적으로 심의하는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계수조정소위원회는 14일부터 사흘간 열리지 못했다. 여야 예결위 간사들은 16일 만나 일단 19일 예산안을 처리하자는 약속만 하고 헤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결국 올해도 ‘막판 초읽기’ 형태의 예산안 졸속처리를 면키 어렵게 됐다는 자탄이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같이 허송세월하고 있는 진짜 이유가 의원들의 민원성 예산을 막후 조정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야당의 한 예결위 관계자는 “며칠 전 우리당의 증액 요구안을 민주당에 보냈더니 사안별로 ○, △, × 등으로 표시해 답을 주더라. 그러나 흡족하지 않아 다시 보낼 생각”이라며 의원들의 민원성 예산을 막후 조정하는 일이 만만치 않은 ‘큰 일’임을 간접 시인했다.

더 절묘한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의원들의 민원 사업을 막판에 나눠먹기 식으로 일괄 타협해 민원을 예산에 반영하지 못한 의원들이 반발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한 책략이란 해석인 것이다.

한 예결위 위원은 “여당과 야당이 서로 ‘저쪽이 아직도 세부사항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떠넘기기 공방을 벌이는 속내에는 사실 의원들의 민원을 다 들어주기 어려운 만큼 전격적으로 예산안을 처리하자는 복선도 깔려 있는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한 해 나라살림의 근본을 세우는 예산안 심의가 정쟁(政爭)에 발목이 잡히다 못해 의원들의 민원에 휘둘리는 지경이라면 결국 국민만 불쌍하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윤종구<정치부>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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