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DJ와 JP가 만났을 때

입력 2001-09-03 18:28수정 2009-09-19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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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DJ와 JP가 손을 잡았을 때 한국인들은 대체로 두 김씨가 걸어온 서로 다른 길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은 것 같다.

1961년 5월16일 김종필(金鍾泌) 중령이 박정희(朴正熙) 소장을 따라 쿠데타를 일으킨 지 이틀 만에 DJ는 3전4기 끝에 단 민의원(강원 인제) 배지를 떼어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DJ의 군부정권과의 불화(不和)는 그 후 납치와 투옥, 사형선고, 망명의 시련으로 이어졌지만 그것은 오랜 과거지사였다. JP 역시 1980년 육사 후배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95년에는 YS로부터 ‘팽(烹)’을 당한 ‘야당’이어서 두 김씨가 손을 잡고 여야(與野) 정권교체를 이루겠다는 데야 그럴 수 있느냐고 뜯어말릴 일도 아니었다.

두 김씨는 그때 99년 말까지 내각제 개헌을 하고 새 정부에서의 대통령과 수상의 선택은 자민련이 우선권을 갖기로 합의했다. 한마디로 2년 후 ‘실권 총리’는 JP가 하겠다는 거였다.

당시 한국인들 중에 이 합의가 지켜지리라고 믿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아마 대다수는 지켜질 수 없는 약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당사자인 두 김씨조차 합의 이행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어떻게 잡은 정권인데 2년 만에 내주겠느냐’는 원색적 논리가 아니더라도 야당이 반대하는 상황에서의 내각제 개헌은 애당초 JP의 ‘희망사항’이었을 뿐이다.

‘정치 9단’인 두 김씨가 그 정도를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두 김씨는 합의문에 서명했다. DJ는 우선 ‘충청표’를 얻는 것이 급했을 테고, JP는 개헌이 안되더라도 ‘절반의 권력지분’이란 보험에 드는 셈이니 마다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99년 7월 DJP가 내각제 개헌 유보에 합의한 것은 사실상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의 과정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작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야당을 선언했던 JP가 올 초 다시 공조로 돌아선 것 또한 단지 ‘표’의 결과였다는 점만은 지적해야겠다. 만약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이 과반수를 넘겼거나 자민련이 17석의 참패를 당하지 않았다면 DJP가 다시 손을 잡았을까?

복원됐던 DJP공조가 여덟달을 못 넘기고 파국을 맞았다. 공조 파기를 선언하고 말고는 형식상의 문제일 뿐이다. 국회 표결로 가는 순간 끝장이 난 것과 다름없다.

DJ는 임동원(林東源) 통일부장관 사퇴 문제를 ‘정권의 문제가 아닌 민족의 문제’로 보는 반면 JP는 6·25 때 숨진 육사 8기 동기생들부터 떠올린다. 임 장관을 물러나게 하는 것은 ‘생잔자(生殘者)의 의무’라는 것이다.

타협하기 쉽지 않은 세계관의 차이다. 걸어온 길이 너무 다른 두 김씨 앞에는 처음부터 정략만으로는 메우기 어려운 ‘이념의 간극’이 가로놓여져 있었다. DJP 공조가 ‘불안한 계약 동거’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근원이다.

그것을 뻔히 알았을 DJ가 한사코 JP를 붙잡은 것은 오로지 ‘수(數)’ 때문이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몇몇 장관 자리에 JP 몫을 떼어준 것도, 온갖 비난을 들어가면서도 자민련에 민주당 의원 넷을 내준 것 모두 ‘수’ 때문이었다. 야당인 한나라당을 숫자로 누르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강박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민련을 끌어안아 이뤄낸 원내 과반수란 기실 ‘허구(虛構)’에 지나지 않았다. 겨우 1석이 넘는 과반수로는 ‘수의 정치’든, ‘힘의 정치’든 제대로 먹혀들 수가 없다.

안타깝게도 DJ는 너무 오랜 시간을 ‘허구의 과반수’에 집착한 듯싶다. 필자가 일찍이 ‘고언(苦言)’했듯이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때 민주당 총재직을 내놓고 여야를 아우르는 큰 지도자의 모습을 보였다면 오늘의 지경에까지야 이르렀겠는가. 늦었지만 이제라도 야대여소(野大與小)의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답방에 들이는 공의 반만이라도 야당에 들인다면, 못풀 일이 있겠느냐는 여권 내부의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DJ와 JP가 만났을 때 파국은 이미 예비되어 있었다. 함께 가기엔 너무 오래 다른 길을 걸어왔으니까.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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