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종욱/4강외교 감정대응 안된다

  • 입력 2001년 4월 12일 18시 32분


최근 한국의 4강 외교에 대한 국내 여론이 갑자기 우경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걱정이다. 일본 교과서 문제를 둘러싼 반일감정의 급부상이 그렇고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NMD) 체제 구축을 놓고 반미 자주외교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 그렇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외교는 감정이나 흥분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자주와 실리사이 균형 필요▼

물론 외교가 여론과 무관할 수는 없다. 외교는 여론의 지지를 바탕으로 할 때 힘을 얻고 강해진다. 그러나 외교의 참다운 바탕은 현실에 있다. 여론도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돼야 한다. 외교는 여론에 끌려 다니고 함몰돼서는 안된다. 자주와 실리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아줄 때 비로소 참다운 실리외교가 가능해진다. 그것이 정부의 책임이고 정치권과 지식인들이 담당해야 할 몫이다.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최근 한국 정부의 4강 외교가 국민에게 혼란스럽게 비춰지는 책임의 일단은 우리 자신에게도 있다. 국민의 정부는 외교의 기본 축을 남북관계 개선에 두어 왔다. 4강 외교의 경우 특히 그랬다. NMD 문제에 대한 한국과 러시아의 애매한 합의와 이에 대한 미국의 민감한 반응도 햇볕정책과 무관치 않다. 민족논리를 지나치게 앞세움으로써 동맹의 중요성이 함몰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미국과 일본의 우려이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98년 방일과 올해 방미가 얻은 최대의 성과는 이런 우려를 불식했다는 사실이었다. 전통적 동맹관계를 기초로 해서 남북화해 협력을 일관되게 추구한다는 원칙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정책의 최우선 가치의 하나로 다루는 중국이나 러시아도 이 점에 대해서는 일단 긍정적이다. 동맹과 민족논리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우리의 외교 현실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주변정세는 중대한 고비에 처해 있다. 지난 해 6월의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냉전구도를 깨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역사적 작업이 본격화됐다. 이 작업에 동참함으로서 각자의 입지를 극대화하려는 4강의 각축전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핵심은 힘을 바탕으로 하는 4강의 실리 추구 외교이다. 현 정부에 주어진 당면과제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외교가 어떤 입장과 전략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다. 4강의 이해득실이 서로 얽혀 있어 우리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선에서 4강의 입장을 조율하는 것이 현재 한국이 가진 능력을 넘어서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의도가 불투명하고 4강의 상호관계 역시 많은 불안정 요인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정부의 전략적 구도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안은 아니라도 선택의 방향을 제시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먼저 한국은 우리 외교의 현실적 토대를 재확인하는 데서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 우리 외교는 한미동맹관계를 기축으로 하고 있다. 미국과 협력하는 것이 사대외교는 아니다. 한미관계를 자주와 사대의 이분법적 잣대로 재단하려는 생각 자체가 우리 민족 스스로의 열등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는 한국이 필요하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다. 미국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갖는 것이 민족의 자존이나 외교의 자주성을 해치지는 않는다. 미국에 대해서도 안되는 것은 안된다고 말해야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래서는 안된다. 감상적 민족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현실적 토대위에서 출발해야▼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교과서 문제를 흑백논리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된다. 따질 건 따지고 시정해야 할 것은 강력하게 요구해야 하지만 외교가 여론에 밀리고 끌려가서는 안된다. 정치논리가 외교에 지나친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외교 책임자들이 차분히 문제를 풀어갈 수 있도록 여론과 정치권이 도와줘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북관계에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 가겠다는 의욕이 4강 관계의 무리한 왜곡을 초래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남북관계는 4강 관계를 지나치게 앞서 나갈 수 없다. 오히려 4강 관계의 조율이 선행돼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정착은 국내의 논리 못지 않게 나라 밖의 논리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정종욱(아주대 교수·정치학·전 주중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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