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게는 2027년에 문을 닫습니다”[정성갑의 공간의 재발견]

  • 동아일보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지난 연말, 일본 교토 여행을 다녀왔다. 교토는 과연 ‘아름다움의 제국’처럼 우아하고 근사한 볼거리가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교토는 원자폭탄 투하 대상지였다. 그곳이 화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미국 육군부 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의 결정적 역할이 있었다. 교토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그는 일본의 고대 수도였던 교토에 각별한 애정이 있었다. 수천 개의 사찰과 신사, 궁전이 있는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아 폭격을 강력히 반대했다. 흔히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한다”고 하는데, 교토는 이 뜬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의 정확한 예시가 된다. 아름다움은 도시와 국가의 최고 경쟁력이자 무기다.

교토에서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중 단 한 장을 고르라면 나는 이 사진을 꼽겠다. 시가지에서 비켜나 2차선의 작은 도롯가에 있던 칼 전문점 하야카와 하모노텐. 언뜻 작은 철물점처럼 보이는 가게 안에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느릿한 몸짓으로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벽안의 외국인이었는데 한 명은 남자, 한 명은 여자였다. 우리 일행이 들어가려 하자 부대낀다는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계산을 위해 오랫동안 줄을 서 있던 눈치였다. 저 사람들이 다 나오면 편히 들어가자 하는 마음으로 바깥에 자리를 잡으려던 순간, 유리창에 붙인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정자로 또박또박 눌러 쓴 영어였다. 문장을 따라 읽어 보니 이런 내용이었다.

“고객분들께. 제 가게를 방문하기 위해 저 멀리에서 와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1937년에 태어났고 혼자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영어를 못 해 여러분을 오래 기다리게 하고 불편함을 끼쳐 드리네요. 죄송합니다. 부디 너그러이 이해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가지 공지를 드립니다. 이 가게는 2027년 6월에 문을 닫습니다. 2027년은 저희 집안이 가게를 연 지 딱 120년이 되는 해입니다.”

당시 시점에서 내년도 아니고 그 이듬해의 일을 이렇게 이르게 알린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진정한 직업인이자 ‘프로’ 같았다. 교토에 올 때마다 루틴처럼 이곳에 들러 새로 나온 칼을 구경하고,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건넨다는 일행 중 한 명은 섭섭한 내색을 끝내 감추지 못했다.

창밖으로 들여다본 할아버지의 몸짓은 차분하고 담담했다. 손님들에게 허리를 숙여 감사의 표시를 전하고, 칼에 구매자의 이름이나 상호를 새겨주는 인그레이빙 서비스도 해 주었다. 한편에 그간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남긴 방명록도 있었다.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이름과 추억이 담겨 있을까. 그렇게 우리 모두의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가다 어느새 막바지 길에 가 닿는다. 노환으로 와병 중인 어머니와 장모님을 보며, 그 마지막 길이 덜 아프고 덜 서러웠으면 하고 바란다.

다시 새해가 밝았다. 분명 설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어둠의 그림자처럼 불안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나는 이 일을 얼마나 더 오래 할 수 있을까. 일 없이 그 긴 노년을 어떻게 보낼까. 건강은 괜찮을까. 얼마나 더 남았을까…. 그 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은퇴의 시점을 스스로 깔끔하게 공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름답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일본#교토#원자폭탄#헨리 스팀슨#사찰#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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