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엔터 문화현장:TV 사극 촬영의 메카, 용인 민속촌

입력 2001-03-20 18:48수정 2009-09-21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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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아홉칸 집은 오후 늦게나 갈 것 같은데.”

“우리는 오전엔 43, 44호에서 찍어요.”

19일 오전 7시50분, 경기 용인시 한국민속촌. 한가한 주차장에 KBS 차량 10대, SBS 차량 9대가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양측 차량 중간지점에서 네 남자가 뭔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다.

최근 ‘사극(史劇)붐’으로 드라마 촬영팀이 붐비는 민속촌에서 자주 보게 되는 새 풍경이다.

‘시간〓돈’인 야외 촬영에서 서로 장소와 시간이 겹치지 않도록 각 프로그램의 ‘진행(FD)’들은 이렇게 아침마다 모여 촬영 스케줄을 조정한다. 촬영이 겹치는 경우에는 씬이 많은 쪽이 먼저 찍는다.

가장 인기있는 장소는 민속촌에 한 채 뿐인 아흔아홉칸 집. 내로라하는 세도가의 집 앞 장면은 모두 여기서 촬영한다. 여섯 채 뿐인 기와집도 붐비는 촬영장소.

매주 월∼수요일은 KBS 수목드라마 <천둥소리>와 SBS 월화드라마 <여인천하>의 촬영이 겹친다. MBC의 <홍국영>도 같은 날 촬영을 하려했으나 세 팀이 동시에 촬영하면 너무 혼잡해 목∼토요일로 옮겨갔다. 여기에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팀도 가끔 촬영을 나오는데다 다음 달 KBS <명성왕후> 촬영까지 시작되면 민속촌은 그야말로 거대한 ‘사극 세트장’으로 바뀌어 거의 매일 바글바글할 전망이다.

새벽 5시에 여의도에 모여 일찌감치 민속촌에 도착한 분장, 소품팀과 엑스트라들은 촬영 준비에 한창이었다. 사극은 소품도 만만치 않지만 엑스트라까지 모두 분장의 손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준비시간이 길다. 배우들의 분장은 차안에 마련된 간이분장실에서 하지만 엑스트라는 차량 밖에서 일렬로 줄을 선 채 수염을 붙인다.

엑스트라 경력이 1년이라는 <천둥소리>의 최용원씨(50)은 “우리야 뭐, 어차피 ‘그림’이니까. 하지만 그림이 받쳐줘야 사극이 산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한다”고 했다.

먼저 도착한 <천둥소리>팀이 정작 9시가 다 되도록 촬영을 시작하지 않아 물어보니 누군가 “도란(정홍채)이가 안와서 그렇다”고 했다. <여인천하>팀도 길상(박상민)이 도착하지 않았다며 진행담당자가 어딘가로 연신 전화를 해댔다.

스탭과 달리 엑스트라들은 느긋한 모습이었다. “우리야 일단 분장만 끝내면 그 때부터 (일당이) 계산되거든.” 오후 6시까지를 기준으로 엑스트라 일당은 3만2000원. 그러나 세끼 식대와 밤샘 촬영 수당이 붙으면 거의 10만원쯤 손에 쥔다.

유난히 검은 얼굴 때문에 ‘깜국장’으로 불리는 <여인천하>의 김재형 PD가 나타났다.

“큐! 한국예술, 움직여!”

김 PD가 특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자 엑스트라 공급업체 ‘한국예술’에서 나온 사람들이 왔다갔다 움직이며 ‘그림’을 만들었다. 한시간가량 장터에서 촬영한 뒤 한약방 골목쪽으로 이동했다.

불과 20m 떨어진 곳에서 <천둥소리>를 찍고 있던 이상우 PD가 김 PD를 찾아와 반갑게 인사한다. 두사람은 김 PD가 KBS에 있을 당시 숱한 사극에서 연출―조연출로 만났던 사이.

“잘 되세요?”

“난 다찌마와리(치고받는 장면)가 있어.”

“저는 오늘 밤(씬)이 많아요.”

낮 12시. 민속촌의 사물놀이 공연이 시작됐다. 꽹과리, 장고 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촬영팀은 동시 녹음을 포기했다. 점심은 각자 민속촌내 식당을 찾거나 차안에서 간식으로 때운다. 점심을 얼른 먹고 막간을 이용해 즐기는 낮잠은 꿀 맛. 오후 2시가 넘으면 늘어난 관광객까지 통제해야 하기 때문에 촬영이 더 어렵다.

민속촌의 김종길 민속과장은 “올해처럼 사극 촬영이 많았던 적이 없다”며 “가끔 촬영팀이 갈 길을 막는다고 사무실로 찾아와 항의하는 사람도 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민속촌측은 사극 촬영이 늘어나자 유료화 여부도 고민 중이다. 시간당 20만원씩 사용료를 받는 경복궁 등 고궁과 달리 민속촌은 무료로 촬영 장소를 빌려주고 있다. 대신 방송사측은 프로그램 중간에 ‘촬영협조 한국민속촌’이라는 자막을 5초씩 두 번 내보내준다.

35년간 사극을 연출, 민속촌 집의 방 크기, 장독대 숫자까지 꿰고 있다는 김 PD는 “민속촌 인근에 들어설 고층 아파트 때문에 밤이면 불빛이 카메라에 잡히곤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서울은 봄날씨라는데 민속촌은 여전히 추웠다. 몇시간 서 있는 동안 취재수첩을 들고 있는 손이 발갛게 얼어 곱을 정도였다. 한 스탭이 “여기서는 5월까지 파카를 안 벗는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스탭들은 다들 두툼한 외투를 입었고 장갑까지 낀 사람도 많았다. 한겨울에는 진짜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여인천하>는 밤 9시, <천둥소리>는 자정을 넘겨서야 촬영을 끝냈다.

<용인〓강수진기자>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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