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황호택/3박자의 타락

  • 입력 2001년 3월 15일 18시 31분


김동인의 대표적 단편소설 ‘감자’(1925년 작품)는 열아홉살 복녀의 비극적 삶을 소재로 다루었다. 결혼에 실패해 평양 빈민굴에 사는 복녀는 비럭질을 해서 배를 채우다가 이웃 여인들을 따라 남의 밭작물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복녀는 칠성문 밖 중국인 채마밭에서 감자며 배추를 훔치다 왕서방에게 덜미를 잡혀 그의 집에 끌려갔다. 그 뒤로 왕서방은 복녀를 만날 때마다 1, 2원을 손에 쥐어주었다. 이른바 원조교제가 시작된 것이다.

▷엄한 기율의 집안에서 자란 복녀도 원조교제의 길로 들어서면서 윤리관에 변화가 생긴다. ‘일 안하고 돈 더 받고, 긴장된 유쾌가 있고, 빌어먹는 것보다 점잖고….’ 왕서방과의 교제는 소위 3박자가 갖추어진 삶의 비결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최근에는 어엿한 집안에서 성장해 학교 성적이 우수한 여중생이 원조교제를 해 충격을 주었다. 경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요즘의 원조교제도 복녀의 타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넉넉한 용돈으로 화려한 생활을 추구하다 3박자의 타락에 한번 빠져들면 마약처럼 끊기가 어려워진다.

▷복녀의 타락은 타율적으로 시작됐지만 이 시대의 복녀는 자발적으로 원조교제를 개업한다. 왕서방네 채마밭 대신에 인터넷 휴대전화 전화방이라는 정보통신시대의 인프라가 수요와 공급을 손쉽게 연결시켜준다. 경찰에서 원조교제 수사는 비교적 쉽고 실적이 잘 올라 인기가 높다. 원조교제 여학생의 휴대전화 통화기록만 조사하면 용의자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나온다. 어느 여중생의 휴대전화 통화기록에서는 100명이 넘는 왕서방 명단이 나왔다.

▷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은 일반 매매춘과 달리 돈을 주고 미성년자의 성을 산 남자를 처벌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습관적으로 원조교제를 하는 질 나쁜 여학생들을 함께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지만 어른의 책임이 더 무겁다. 우리 사회는 선진국에 비해 청소년을 보호하는 사회 의식이 낮고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 7월부터는 원조교제를 행한 어른들의 명단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니 바람기 많은 남자들은 패가망신하지 않도록 조신(操身)할 일이다.

<황호택논설위원>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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