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장고 끝의 한 수

  • 입력 2000년 12월 18일 19시 00분


“한 일년 있다 보니까 이래서는 안되는데 싶더군요. 야당 할 때 식으로 국정을 운영하려고 드니 구멍가게 주인이 백화점 경영에 나선 격이라고나 할까요.”

YS 정권에서 청와대에 몸 담았던 한 학계 인사는 이렇게 운을 뗐다.

“이른바 민주화세력은 그 뜻은 옳은지 몰라도 국정운영에서는 대체로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았어요. 정권은 잡았지만 국정을 운영해본 경험도, 능력도 부족한 상태에서 ‘우리가 옳다’는 생각만 앞서니 뒷감당이 안되는 거죠. 그러면서도 인기랄까, 대중의 반응에는 민감하다 보니까 자꾸 무리수를 두게 되고 정책의 일관성도 흔들리는 겁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갈 수 있는 정치세력과 정책세력이 결합하고 시민세력이 밀어줘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는커녕 권력 내부의 부패와 ‘황태자의 전횡(專橫)’이 불거지면서 ‘문민개혁’은 제풀에 좌초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DJ 처방전'과 무장해제론▼

“우리 사회에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선생이 말한 경장(更張)세력, 즉 개혁세력이 약한 반면 수성(守成)세력은 강하지요. 유능한 관료들이란 대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은 잘 하지만 개혁정신은 약합니다. 집권자의 입맛에 맞추는 정도지요. 헌신적이고 전문성을 갖춘 리딩그룹이 국정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전문성이 결여된 민주화세력의 국정운영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전문성을 갖춘 헌신적인 리딩그룹은 이른바 ‘개혁 엘리트’를 뜻하고 개혁이 힘을 받으려면 이들 세력의 집단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경우 그동안 개혁세력을 제대로 키워오지 못한데다 그나마도 지역주의로 분열되고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그것을 통합해내야 할 정치는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고 심화시켜왔다.

김대중(金大中)정권이 맞고 있는 위기도 그 근원을 살펴보면 결국 ‘양김(兩金)식 정치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정쇄신의 옳은 해법 역시 근본원인에서부터 찾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는 ‘DJ 처방전’이 해법 그대로라면 그것은 정말 ‘아니올시다’다. 민주당의 ‘얼굴마담’을 바꾸고, 동교동계 가신(家臣) 몇 명을 뒷전으로 물러나게 하고, DJP 공조(共助)를 복원하고, 개각은 천천히 내년 봄쯤에나 생각해본다? 그런 정도로 ‘국민이 바라는 국정개혁의 결단’이 될 수 있을까.

김대통령의 민주당 당적이탈 얘기만 나오면 집권측은 펄쩍 뛴다. “우리만 무장해제한 채 2년 후 한나라당에 정권을 고스란히 넘겨주란 것이냐”는 반박이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당 총재직을 떠나면 정권이 야당에 넘어간다는 논리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 더구나 ‘무장해제’라니.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정권은 ‘무장해서 잡는 것’이 아니고 국민의 지지로 위임받는 것이다.

김대통령이 당적을 떠나면 ‘한나라당의 흔들기’가 더욱 심해질 것이란 우려도 설득력이 약하다. 오늘의 위기를 부른 것은 김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내치(內治) 실패’ 때문이지 야당의 ‘발목잡기’ 탓으로 돌릴 일은 아니다. 아직 ‘이회창(李會昌) 야당’이 ‘확실한 대안(代案)’으로 떠오른 것도 아니다. 김대통령이 정파를 떠나 국정에 전념하고 민주당이 제 힘으로 일어설 때 오히려 정권재창출의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위기는 기회다▼

무엇보다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김대통령이 정권재창출에 연연하지 않는 큰 지도자의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말고 국민에게 감동과 희망을 줄 수 있는 다른 마땅한 소재가 있을지 궁금하다. 김대통령이 큰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면 ‘노벨상 효과’도 되살아나고 ‘DJ의 도덕적 권위’ 또한 빠르게 회복될 것이다.

도덕적 권위 회복이야말로 흩어진 개혁세력의 힘을 한데 모으는 길이다. 그렇게 판을 크게 바꿔야 국정의 중심이 바로 설 수 있다. 그래야만 진정한 개혁도 이뤄질 수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 2년여 임기가 남은 현시점의 위기는 거꾸로 기회일 수 있다.

국정을 쇄신하기 위한 김대통령의 장고(長考)가 역사와 시대를 내다보는 큰 그림을 그려내기 바란다. 장고 끝에 악수(惡手)를 두어서는 안된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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