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영미/‘군위안부’와 소화

  • 입력 2000년 12월 11일 18시 39분


‘위안부와 쇼와(昭和).’ 쇼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천황이었던 히로히토(裕仁)의 연호이고 위안부는 당시 일본군에 의해 강제연행돼 성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던 여성들을 일컫는다.

한국인에게는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두 단어가 일본 도쿄(東京) 한복판에서 다시 만났다. 전범재판으로서는 처음으로 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여성국제전범법정이 도쿄 구단시타(九段下)의 쇼와칸(昭和館)과 맞붙은 구단회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쇼와칸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일본군의 유족을 비롯한 일본국민이 ‘전시에 얼마나 처참한 생활을 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지난해 3월 문을 연 전시관으로 ‘일본이 전쟁의 희생자였다’고 부각시키고 있다.

국제법정이 열리는 구단회관 역시 일본유족회가 수익사업으로 운영하는 건물이다. 회관 맞은편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군을 미화하는 야스쿠니(靖國)신사가 버티고 있다. 국제법정이 시작되자 대형 스피커를 단 우익 차량들은 ‘군위안부는 강제가 아니었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주변을 빙빙 돌고 있다.

국제법정 주최측은 회의장과 숙박시설 이용료가 싸기 때문에 이곳을 행사장으로 선정했다고 소박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우익의 본산 한복판에서 테러 위협을 무릅쓰고 한국 등 8개국의 민간단체가 히로히토 천황, 일본군과 관료 등의 전쟁 책임을 묻기 위해 마련한 국제법정의 상징성과 파급효과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동안 전쟁 책임에 대해 묵묵부답과 무행동으로 일관해온 일본정부와 일본사회를 향해 국제사회가 던지는 엄중한 경고이기 때문이다.

특히 국제법정에 대해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는 대부분의 언론을 비롯한 일본 사회는 남한측 검사단 대표인 박원순 변호사가 기소장을 마무리할 때 인용한 한 철학자의 말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과거를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잘못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이영미<도쿄특파원>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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