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워터 프론트

  • 입력 2000년 12월 11일 16시 56분


▼<워터 프론트> (On the Waterfront, 1954)▼

감독: Elia Kazan,

출연: Marlon Brando, Eva Marie Saint, Karl Malden

엘리아 카잔 감독의 '워터 프론트'는 어렵고도 암울했던 시절, 한 사람의 자각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명화이다. 그 한 사람은 교육과 훈련으로 '사상'을 갖춘 특별한 사람일 필요가 없다. 이렇다 내 세울 것 없는 필부도 역사가 명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양심의 명령에 따르면 세상이 동조하는 것이다.

음습한 항구도시의 빈민 아파트에서 살인사건이 발행한다. 죽은 사람은 부두 노동자 청년이다. 그가 왜 죽었는지, 그리고 누가 범인인지 모두가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 통용되는"D&D" (Deaf and Dumb)법이 두려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한다. 부패한 노조의 존 프렌들리 일당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본질을 모르는 건달 청년 테리는 형과 함께 프렌들리의 비호 속에 생계를 유지한다. 형제는 이 사건에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테리는 프렌들리의 '보살핌'을 고마워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지울 수 없다. 비보를 듣고 인근 읍의 대학 기숙사에서 달려온 피살자의 누이동생 이디가 진실을 밝히려 나선다. "왜 학교에 돌아가야 해요? 저렇게 시퍼렇게 살인과 불법이 자행되고 있는데요." 말리는 아버지에 대들면서 그녀가 던진 항변이다.

영화는 테리와 이디의 교감 과정을 주목한다. 청년 테리가 가녀린 모습의 이디와 함께 걷는다. 여인의 싸구려 장갑 한 짝이 땅에 떨어진다. 청년이 이를 천천히 주워 들어 흙을 털어 낸다. 그리고는 놀이터의 그네 위에 앉아 다소 거만하게 몸을 흔든다. 커다란 손을 억지로 장갑 속에 쑤셔 넣는다. 장갑이 찢어질 것만 같은 위기감이 든다. 겁먹은 표정으로 여인은 장갑을 되돌려 받으려는 몸짓을 한다. 그 사이에 무식한 건달과 예비선생 여대생 사이에 몇 마디 어줍잖은 대화가 오고 간다. 마침내 낚아채듯 장갑을 되찾아 끼고 여자가 길을 나선다. 혼자서는 위험하다며 반 강제로 사내가 따라 나선다.

"다시 만나고 싶은 데요."

"왜요?"

"그냥."

남녀의 어색한 교감이 사상을 싹트게 하고 그 사상이 사랑을 감싸주게 되는 것이다. "당하기 전에 선수를 쳐야한다"를 인생좌우명으로 삼은 거친 사내와 이 세상은 "누구나 함께 사는 것"(everybody is part of everybody)임을 믿는 이상주의자 여대생 사이의 인격적 결속 과정을 주목함으로써 '사랑'이 '사상'의 자각의 원동력임을 암시한다. "오빠도 당신처럼 비둘기를 키웠지요." 허름한 시멘트 건물 옥상에 사육장을 만들어 놓고 이웃의 어린 소년과 한가로운 잡담을 즐기는 테리를 찾으면서 이디가 화답하고 죽은 오빠가 입던 옷을 테리에게 입혀줌으로써 둘은 영적 결합을 이룬다.

이 지역 교구의 배리 신부는 끊임없이 노동자의 양심의 자각을 호소하나 성공하지 못한다. 신부의 종용에 따라 경찰에 양심선언을 한 노동자는 '사고사'를 당한다. 경찰에 넘긴 서류가 통 채로 프렌들리의 집단에 되돌아온 것이다. 경찰과 노조 사이에 부패의 견고한 연결고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절망하는 이디에게 신부는 "신념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라"(time and faith)고 달랜다. 번민하는 테리에게 배리신부는 여자를 사랑한다면 진실을 밝히라고 권한다.

마침내 오빠의 죽음에 자신이 관여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테리, 뱃고동 소리가 삼켜버리는 이디의 절규, 이를 멀리서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배리신부, 이 장면은 한 사회의 축약도로 규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테리와 이디가 급속하게 가까워지고 테리가 법정에서 진실을 증언할 기미가 보이자 프렌들리는 테리의 형에게 동생을 죽이라고 명한다. 그러나 형은 마지막 설득의 기회를 달라고 간청한다. 할리우드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택시 뒷자리에서 나누는 형제간의 절박한 대화 장면이다. 동생은 이제까지 형이 자신을 인도하여 온 인생 노정의 의미를 반문한다. 형의 보호 아래 권투선수로서의 꿈을 키우던 자신은 결국 사기게임으로 입에 풀칠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고 그나마 나이가 들어 깡패조직에 기식하는 건달이 되지 않았는가? "제대로 풀렸다면 나는 정식으로 챔피언 도전자도 가 될 수도 있었어! (I could have been a contender.)" 그런데 보시다시피 '쓰레기'(bum)신세가 되었잖아. 더 이상 형처럼 사기집단, 범죄조직에 몸을 의탁하여 살기 싫어."

이제 동생이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확인한 형은 더 이상 설득을 포기하고 대신 자신이 죽임을 맞는다. 테리는 형이 남겨준 총을 들고 복수에 나선다. 그러나 배리 신부가 총을 뺏아 유혈사태를 막는다. 총을 내던지기 전에 테리는 프렌들리 일당이 경영하는 바의 거울에 붙어 있는 프렌들리의 사진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나 그의 분노의 총구가 겨냥한 진짜 표적은 부법의 착취자 프렌들리가 아니라 거울에 비친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의 총격은 부정한 권력에 기생하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결별의 선언인 것이다. 맨손으로 프렌들리 일당에게 대항한 테리는 무참하게 린치를 당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권리의식을 '자각'한 동료노동자들은 무언의 결속을 통해 부패와 독재 체제에 항거한다. 고래고래 악을 쓰는 프렌들리 만을 뒤에 남겨두고 노동자들은 부두 하역장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 들어간다. 피투성이의 테리가 비틀거리면서 이들을 인도한다. 세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장면을 목격한 니디와 배리 신부가 감격의 포옹을 나눈다.

테리가 부패한 부두노조의 보스, 프렌드리 일당에 대해 저항한 것은 거창한 이념이나 사상 때문이 아니었다. 오로지 동생을 감싸려다 죽은 형과 여자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이 땅의 역사에 일대 전기를 마련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시린 몸에 기름을 끼얹어 산화하기 전에 "나에게는 왜 대학생 친구 하나 없나"라고 절규했다. 만약 그에게 이디와 같은 대학생 여자친구가 있었더라면 혹시 역사는 달라졌을까?

안경환<서울대 법대 교수> 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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