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영균/‘이삭뽑기’식 성장 이제 그만

  • 입력 2000년 12월 3일 19시 43분


어느 농부가 자기 밭에 보리가 잘 자라나지 않자 보리 이삭을 길게 뽑아 놓았다. 그리곤 마음이 흐뭇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내가 보리를 자라게 하느라고 수고가 많았어”라고 가족에게 자랑했다. 다음날 그의 아들이 밭에 나가 보니 보리는 벌써 말라죽어 있었다.

지난주 김대중 대통령이 최근 경제가 나빠진 데 대해 국민에게 사과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이 우화가 생각났다. 몇 달 전만 해도 경제위기에서 성공적으로 벗어났다며 외국인들까지 불러다 ‘성대한 잔치’를 벌이지 않았던가. 3년 전 경제위기가 닥치자 이삭을 뽑아놓고 그것을 위기 탈출이라고 착각했던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과거엔 그야말로 이삭뽑기식 성장이 유행이었다. 80년대의 중공업, 90년대의 석유화학, 그리고 금융업에 대한 과도한 투자가 바로 그 전형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대형공장이 완공되는 걸 보고 흐뭇해하던 게 다반사였다. 그러나 이런 산업들은 결국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고 있다. 투자액에도 못 미치는 헐값에 외국으로 팔려나가고 애꿎은 노동자들은 거리로 쫓겨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이삭뽑기식 성장에는 편법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세금을 깎아주고 저리의 자금을 지원해주는 특혜가 따라붙는다. 그래서 이른바 권력층과 가까운 사람들이 허가를 받고 사업을 벌이게 된다.

지금 한창 구조조정이 진행 중인 금융업이나 벤처가 바로 그 전형이다. 과거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은행 종합금융회사 보험회사 신용금고를 새로 허가를 내주었다. 금융업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 권력층과 안면이 있거나 정치자금을 바친 대가로 금융회사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런 회사들은 대개 부실의 길을 걸었다. 금융업의 경험이 없다 보니 감독원 출신 등을 데려다 사장을 시켰으나 십중팔구 경영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한때 30개를 넘던 은행은 이제 20여개 정도로 줄었고 앞으로는 절반 정도만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보험회사 신용금고도 마찬가지다. 신용금고와 종합금융회사는 이제 이름마저 사라질 운명이다. 우후죽순처럼 100여개나 생겼던 창업투자회사들도 얼마나 쓰러질지 예측키 어렵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위기가 닥치고 있다. 어쩌면 이미 위기가 와 있다고 보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유례 없는 호황이라던 미국경제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경제전문가들은 장기 불황의 조짐을 경고하고 있다. 애당초 1, 2년 만에 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정부가 한때 모델로 삼으려 했던 스위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의 중견국가들은 경제성장률을 2∼3% 수준을 넘지 않도록 조절한다고 한다. 우리도 10%가 넘는 고성장과 마이너스 성장을 되풀이할 바엔 차라리 2%대의 안정성장이 낫다. 그 대신에 교육 환경 의료 부분을 선진화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젠 이삭뽑기식 과시형 정책은 포기해야 할 때다.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위기를 극복해가자. 혹시 다음 선거를 염두에 두고 경기부양을 서두르지 않을까 걱정되는 탓이다.

박영균<금융부장>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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