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재호/교차압력이 작동하는 정치

  • 입력 2000년 11월 26일 18시 38분


교차압력(cross pressure)이란 말이 있다. 사회 구성원들이나 계층들은 서로 압력을 가하고 받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대해 100% 적대적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A씨는 농민이지만 아들은 도시에서 공장에 다닌다. 그는 언제나 농민의 이익을 생각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도시에서 박봉에 시달리는 아들의 고통에도 마음을 졸인다. “차라리 내가 힘들고 말지…”하고 생각할 때가 많다.

B씨는 아들이 의사이지만 사위는 약사다. 그는 약사 사위를 얻기 전까지는 의약분업에 관한 한 결단코 의사 편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고민한다. 어느 한쪽 편을 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처럼 크고 작은 압력들이 수없이 횡으로 종으로 교차한다. 계급화, 계층화의 논란을 떠나 우리의 일상(日常)은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을 절대적으로 증오할 수 없게 돼 있다. 그것은 본질적인 것처럼 보인다.

큰아들은 부채장수이고 작은아들은 우산장수인 할머니가 비가 오면 큰아들을 걱정하고, 햇볕이 쨍하면 작은아들을 걱정했다고 했던 옛날 얘기는 교차압력에 관한 한 어떤 사회학자의 설명보다도 설득력이 있다.

교차압력은 곧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의존성을 뜻하는데 요즘 사용되는 ‘다원적 정체성(multi―identity)’이란 개념도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벨기에의 브뤼셀에 근무하는 독일인 K씨는 누구인가. 그는 민족적으로 독일인이고, 행정적으로는 브뤼셀의 주민이며, 지정학적으로는 유럽연합(EU)의 일원이다. 그는 어쩌면 ‘IBM사의 직원’으로 불리기를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다원적 정체성’의 전형이다.

교차압력이 작동하고 ‘다원적 정체성’이 용인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다. 이 둘은 사회 전반에 걸쳐 이해관계가 중첩되는 영역들을 만들어냄으로써 극한대결의 여지를 줄여준다.

다시 한해가 저문다. 올 한해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파당화와 지역화’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어떤 문제라도 일단 이슈가 되면 당파와 지역에 따라 이쪽 저쪽으로 갈렸다. 사안 자체의 복잡성이나 절대성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양쪽으로 나뉘어 서로 끝 모를 증오와 불신만을 뿜어냈다.

동시대를 사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수없이 겹치는 부분들이 있을 텐데 이런 것들이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 우리는 누구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누구일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데 이게 통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총재의 24일 ‘조건 없는 국회 등원’ 결정은 주목할 만하다. 이총재는 “국정을 포기한 이 정권을 상대할 것이 아니라 국민을 바라보면서 제1당의 본분을 다하겠다”고 했다.

그는 ‘제1당의 본분’이라는 표현을 썼다. 맞는 말이다. 한나라당은 야당이면서 제1당이다. 야당으로서 한나라당에 거는 기대(압력)가 있다면 제1당으로서의 한나라당에 거는 기대도 있다. 양자는 교차한다. 이총재의 등원 결정은 그 정치적 고려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에서도 교차압력이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재호<정치부장>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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