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정재락/'유령 집회'

  • 입력 2000년 10월 31일 19시 04분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집회 시위의 시간과 장소가 같을 경우 먼저 신고한 것만 받아주게 돼 있다. 그런데 먼저 신고한 측이 실제로는 집회를 하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왜 그럴까.

기업들이 근로자들의 집회를 미리 막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울산의 경우 지난해 7월 울산지방경찰청 개청 이후 9월 말까지 총 1172건의 집회(시위)신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중 315건(26.8%)은 실제로 집회를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노조나 해고근로자들의 집회를 막기 위한 기업측의 ‘유령집회 신고’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울산 울주군 S사는 ‘원직복직’을 요구하는 해고근로자의 집회를 막기 위해6월부터12월31일까지 회사 정문 앞에서 ‘IMF 극복을 위한 사원 결의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선수를 쳤다. 이에 맞서 해고자들도 같은 기간에 회사의 다른 출입구에서 집회를 하겠다고 신고했으나 회사측이 법원에 낸 ‘업무방해 금지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진 9월부터는 집회를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내년에는 회사측보다 선수를 쳐 최근 경찰에 1월1일부터 6월30일까지 집회를 갖겠다고 신고했다.

또 울산 동구의 H사도 해고근로자의 회사 정문집회를 막기 위해 5월부터 10월말까지 ‘비전 2005 실천 결의대회’ 명목으로 집회신고를 했다.

경찰 관계자는 “현행 집시법은 집회기간 제한이 없는 데다 나중의 집회신고는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회사측이 근로자의 집회를 ‘합법적으로’ 막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모 회사 관계자는 “외국 바이어들이 많이 드나드는 회사 정문에서 근로자의 집회가 계속되면 회사에 나쁜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집시법의 맹점도 문제지만 기업들의 행태도 군색하지 않은가.

<정재락 기자>jr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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