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책사람세상]독후감의 두얼굴

  • 입력 2000년 10월 13일 19시 42분


고려말 조선초의 유학자 권근(權近·1352∼1409)의 저서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이 있다. 시(詩), 서(書), 예(禮), 역(易), 춘추(春秋)의 5경에 대한 주석인데, 우리 나라 학자가 집필한 현존 최고의 유교 경서 주석이기도 하다(‘예기천견록’은 태종 때 활자본으로 간행).

그 가운데 ‘주역천견록’은 보물 5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까지 ‘춘추천견록’만 발견되지 않고 있다.

◇후학들에 실질적 도움

소설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에서 영조의 어필 ‘시경천견록’이라는 책이 거론되는데, 물론 권근의 오경천견록 가운데 하나인 시경천견록은 아니다. 천견이라는 말은 ‘In my humble opinion(내 짧은 견해로는)’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결국 권근이 유교 경서를 읽고 집필한 독후감인 셈이다.

명청 교체기의 사상가 왕부지(王夫之·1619∼1692)의 ‘독통감론(讀通鑑論)’은 역사서 통감의 내용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 이른바 화이론(華夷論)을 중심으로 하는 왕부지 나름의 역사관을 전개한 책이다.

19세기 중국 민족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저작으로도 이름이 높다. 일종의 독후감이면서 그 자체가 명저의 반열에 드는 경우다.

위의 두 경우와 맥락은 다르지만,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장정일의 ‘장정일의 독서일기’도 독후감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 공간에 독후감을 올리는 분들도 적지 않은데, 신민식씨의 홈페이지(http://my.dreamwiz.com/hotfood/)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가수 아트 가펑클이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읽은 책의 목록을 볼 수 있는 웹페이지(http://artgarfunkel.com/library.htm)도 특기할 만 하다. 이런 기록들은 한 인간의 지적 편력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일 뿐만 아니라, 동시대 또는 후대의 많은 독서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으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에서 독후감 쓰기를 강요받곤 했다. 최근에는 대입 논술고사 준비 차원에서 독서교육 또는 독후감이 부각되기도 한다.

독서의 즐거움을 반감시키는 역효과를 낳는 것은 아닌지, 어떤 목적을 위해 책을 읽고 소감을 적어야 하는 부담감 속으로 젊은 독서인들을 몰아넣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강제로 시키면 고문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부과되는 책읽기가 어떤 것과의 만남을 강요하는 본질주의적 책읽기가 돼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책읽기라기보다는 정답 찾기에 가깝다. 더구나 만남의 결과를 고백하는 일마저 독후감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된다면, 그것은 차라리 고문에 가깝다.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책읽기의 개인사를 고백할 수 있는 여건과 분위기를 마련해주는 것 이상의 일은 불필요하다.

표정훈(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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