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칼럼]‘문신’자랑 그리고 他人

  • 입력 2000년 10월 6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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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팔뚝이나 등에 새긴 문신(文身)을 보게 되면 움찔하게 된다. 그것이 뱀이 아니고 설령 컬러로 채색한 꽃이라도 그렇다. 아름다워 보이기는커녕 혐오스럽다. 물론 새겨넣는 자는 스스로 좋아서, 남의 시선을 끌기 위해 그러는 것이리라. 하지만 문신을 보면 놀라고 불쾌해 하는 건 너나없이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라마다 샤워장 입구에는 ‘문신자 사절’을 써붙이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문신은 오랜 옛날이나 미개사회에서는 신분과시나 장식용으로 새겨진 적이 있다. 액운 악마를 내쫓기 위한 살갗 위의 부적같은 주술(呪術)적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좋지 않은 이미지일 뿐이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은 죄수에게, 영국은 탈영병에게 전력(前歷)을 표시하는 의미로 새겼다. 나치의 수용소에서나 시베리아의 감옥에서도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문신을 했다. 우리 옛 기록에도 도망친 노비나 죄인을 문신으로 알아보게 했다는 게 있다. 오늘날에도 문신은 폭력 불량배나 수감전력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문신은 열린 문명, 성숙한 문화의 측면에서 보면 분명 뒤떨어지고 변태적인 하나의 일탈(逸脫)이다. 현대에 들어 문신이나 피어싱(구멍뚫기)의 유행은 폴리네시아인들의 그것을 본 서구 선원들이 흉내낸 데서 비롯됐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눈부신 첨단과학의 시대, 교육을 잘 받은 젊은이들 사이에서조차 참으로 원시적인 피부자해(自害)가 조용히 번지고 있다.

미국 일리노이주의 한 의회에서는 문신을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원래 18세가 넘어서면 문신을 할 수 있도록 한 법을 이번에 21세로 올리는 ‘보수적’개정을 시도하자 반발이 생긴 것이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은 나의 자유다. 18세 넘으면 성인이다’고 하는 젊은이들이 있고 거기에 문신업자들이 가세하고 있다는 보도다.

먼 미국의 일이지만 흥미로운 뉴스다. 내 몸, 내 살갗이니까 남이 뭐라든, 타인이 어떻게 느끼든 간에 내 멋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문신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는 측이다. 보는 이의 불쾌감이나 타인이 느끼는 다소간의 심리적 불안 동요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놀랍게도 ‘자유의 신천지’라는 미합중국 50개주 모두 문신규제 입법을 갖고 있다. 그 내용이야 애리조나 미네소타 뉴햄프셔주 같은 데서는 ‘18세 이상’만, 사우스캘리포니아주 같은 데서는 21세가 넘어야 문신을 할 수 있게 하는 식으로 다양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규제는 엄연히 존재한다. “젊은이들끼리 문신을 좋아하고 그것을 새기는 게 자유라 해도 타인과 공공을 위해 무제한일 수는 없다”는 취지다.

내 몸, 내 살갗이라 해도 제 멋대로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유와 권리의 나라 미국’에 그런 법이 있다? 새삼 우리나라에는 그런 문신규제법 같은 것이 없는데 생각이 미치게 된다. 더불어 내 것, 내 소유, 제 권리에 대해 ‘남이야 무슨 간섭이냐?’는 의식이 넘치는 이 사회, 그 안의 어깃장과 갈등 실패를 생각하게 된다. 몇몇 재벌기업의 처치곤란의 붕괴, 그로 인한 나라경제의 불안, 그동안 불가침(不可侵)의 소유를 근거로 떵떵거리기만 하던 총수들의 문신자랑과도 같은 엄청난 독단과 전횡을, 그 폐해를 떠올리게 된다.

일전에 선천성유전병(터너증후군)과 행동장애를 앓는 아들을 교살한 어머니가 있었다. ‘아이의 평생 고통을 덜어주고 내가 그 벌을 지고 가겠다’는 자수(自首)의 변에서, 자식을 ‘소유물’로 간주하는, 제 피붙이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섬뜩한 편의주의와 생명경시를 읽게 된다. 아이들의 뼈아픈 따돌림, 장애아를 보듬지 못하는 사회구조도 문제지만 그것이 자식살해를 정당화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오늘도 의사들은 타인의 생명을 볼모로 한 세번째 파업투쟁을 벌이고 있다. 전문성과 대체불가능의 직역이라는 이유로 타인의 생명조차도 도외시하겠다는 죽기살기 식의 이른바 ‘의권(醫權)수호투쟁’이다. 사회의 발전과 문화의 성숙은 타인과 공공에 대한 배려, 거기에 다양한 직업군 및 불특정 다수인 간의 쾌적하고도 조화로운 어울림으로 나타난다. 저만 좋다고 남들이 싫어하는 행위를 자제할 수 없고, 제어할 수 없으면 그건 병들고 상한 공동체다.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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