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의 옛그림읽기]용상과 대우주의 조화 예술로 완결

  • 입력 2000년 10월 3일 18시 44분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이하 오봉병)은 조선 궁궐의 용상 뒤에 쳤던 병풍이다. 조선의 왕은 반드시 이 병풍 앞에 앉는다. 멀리 행차를 할 때도, 죽어서 관 속에 누워도, 심지어 초상화 뒤에도 ‘오봉병’은 놓인다. 작품 오른편에 붉은 해, 왼편에 하얀 달이 동시에 떠 있다. 그것은 낮과 밤이 공존하는 현상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낮과 밤의 근원을 그린 것이다. 화면은 완전 대칭에 광물성 물감으로 그려져서 화려 장엄하며 색채가 눈부시다.

‘오봉병’의 세계는 관념적, 추상적이지만 우주의 조화를 상징한다. 하늘의 해와 달은 음양이다. 음양은 우주를 이루고 지속시키는 두 힘이다. 하늘(天)은 하나(一)로 크고(大) 이어져 있다(―). 땅은 뭍과 물 둘(二)로 나뉘어 끊어져 있다(――). 해와 달은 자강불식(自强不息)한다. 하루도 예외 없이 정확한 시간에 주어진 행로를 걷는다. 땅은 후덕재물(厚德載物)이다. 두텁게 쌓여 자애롭게 만물을 실어 기른다.

다섯 봉우리가 있다. 오행(五行)이다. 그 좌우에 흰 폭포 두 줄기가 떨어진다. 물은 햇빛 달빛과 함께 생명의 원천이다. 그 힘이 하늘과 땅 사이의 만물을 자라게 한다. 만물 가운데 가장 신령하고 도덕적인 존재가 사람이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덕이 가장 커서 드높은 존재가 왕이다. 왕은 날마다 ‘오봉병’ 앞에 앉아 경건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하루의 정사에 임한다. 그러면 하늘(天) 땅(地) 사람(人)의 삼재(三才·우주를 이루는 세 바탕)가 갖추어진다.

음양오행은 동양학의 기본이며 사유의 틀이다. 그것은 1000가지 1만 가지로 분화 전개되는데, 인격인 경우 건순오상(健順五常)의 덕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음양오행을 본받는다는 것은 굳셀 때 굳세고 부드러울 때 부드러우며 항상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미덕을 실천한다는 뜻이다. 왕은 ‘오봉병’ 앞에서 올곧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 하늘과 땅과 사람을 꿰뚫는 이치를 내 한 몸에 갖추어야 한다. 그 때 삼재(≡)를 관통하는 대우주의 원리가 사람이라는 소우주 속에서 완성된다.(三+|〓王)

왕이 정좌하면 우주의 조화를 완결짓는 장엄한 참여 예술이 연출된다. 요즘 참여예술(performance)이라면 사람들은 발가벗은 여인이 겹겹이 싸맨 비닐을 하나씩 둘씩 내 던지는 장면을 상상할 것이다. 인간의 참여란 그런 것이 아니다. 순간의 충격으로 세인의 이목을 끌거나 표피적 자극으로 일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예술은 평범한 삶을 북돋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겸허하게 자연을 배워 우주의 질서를 완성케 한다. 대지에 굳게 뿌리박고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저 붉은 우주목(宇宙木)처럼….

(중앙대 겸임교수) josoh@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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