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호표/상상력과 금지의 덫

  • 입력 2000년 10월 1일 18시 34분


미국 뉴욕 맨해튼 한복판 록펠러센터에 있는 레스토랑 ‘레인보’. 흰 수염의 노신사가 파티 현장에서 살짝 빠져나와 칵테일잔을 든 채 하염없이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맨해튼의 밤은 정말 아름답지요. 저 앞 건물은 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불을 켜 놓았는데 일주일간 매일 돌아가면서 일곱가지 색깔로 조명해요. 빨강 파랑 노랑…. 무지개의 아름다움이란….”

안쪽에서는 유명 대학 총장과 학자들, 미국 연방상원의원 2명 등이 참석한 가운데 파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밤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노신사와 같은 차에 탔다. 그는 계속 맨해튼의 밤과 무지개색을 읊었다. 그가 내린 뒤 물리학자인 미국 에너지부 산하 국립브룩헤이븐연구소장 존 마버거 박사가 에그(egg)와 스펌(sperm)이란 단어를 섞어 ‘유명한 생화학자 윌리엄 레나즈 교수’에 대해 설명했다.

“그 친구, 재미있지요? 수억 마리의 정자가 헤엄쳐 오는데 난자는 ‘1등 정자’만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지요. 난자가 왜, 어떻게 나머지 정자를 거부하는지를 밝혀낸 게 저 친구입니다. 피임의 원리로 이용되고 있지요.”

이탈리아 볼로냐대 움베르토 에코 교수는 인문학계의 요란한 화두였던 ‘기호생산이론’을 제시한 기호학의 대가다. 그의 제자인 연세대 김주환교수가 들려준 에코교수의 강의실 풍경.

“학생들에게 강의를 자주 시킵니다. 당신은 뭔가 낙서를 하고 계세요. 가끔씩은 이상한 그림도 그리고 있지요. 그런데 학생의 강의가 끝나면 반드시 강의내용에 대해 정확하게 코멘트하십니다.”

우리 식으로 보면 레나즈교수와 에코교수는 모두 ‘딴짓’을 하고 있다. ‘딴짓’은 자주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씨가 아이디어의 원천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아들의 웃음이나 눈빛을 보고 ‘드자아인’해요. 또 한가지는 물과 풀입니다. 그래서 주말이면 산과 들로 나갑니다.”

그의 디자인은 이집트문화나 페르시아의 문양만으로 된 게 아니다. 그 독특한 디자인 속에는 아이의 표정, 물과 풀 같은 순수함이 배어 있다.

상상력은 실현됐을 때 가치를 인정받는다. 상상력의 산물인 아이디어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치열한 자체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만화가 양영순씨는 성 만화 ‘누들누드’가 체험이 아닌 100% 상상력의 실천이라고 고백했다. 인기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 소설 ‘DMZ’도 김훈중위사건 이전에 나온, 상상력의 산물이다. 좀 느끼한 듯하지만 사디즘의 원조인 프랑스 소설가 사드조차도 상상력을 훌륭하게 실천했다. 상상한 것들을 솔직하게 글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소돔 120일’은 그 생각의 ‘건전성(또는 외설성) 여부’를 떠나 성(性)에 관한 엽기적인 상상력의 대기록이다.

프랑스 68혁명의 주요 주장 가운데 하나가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로!”와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였다. 그들은 상상력을 가로막는 제도도 ‘금지’로 보고 저항했다. 비단 신좌파적 상상력에 국한될 수 없다. 우리사회에서의 상상이나 ‘딴짓’은 유해성 여부를 떠나 질타의 대상이 된다. ‘매뉴얼화된 상상력’만이 허용되는 ‘금지의 사회’이므로.

며칠 전 동성연애자임을 고백했던 탤런트 홍석천씨도 ‘금지의 덫’에 걸려 TV를 떠나야 했다.

hp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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