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의사]저수가-과잉진료 방치…환자·병원 모두 고통

  • 입력 2000년 8월 25일 18시 39분


연세대 의대 한동관(韓東觀)교수 등 4명은 이달 초 헌법소원을 냈다.

민간의료기관을 의료보험 요양기관으로 강제 지정한 국민건강보험법 40조 제1항이 위헌이라는 주장.

이들은 “국공립병원과 달리 아무런 정부지원도 없는 상태에서 민간병원을 사회보험에 강제 가입토록 해 적자를 보고 있다.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행복추구권 및 사유재산소유권 침해”라고 말했다.

‘저수가 규격진료(의료보험규정에 맞춰 하는 진료)’를 기본으로 하는 현재의 의료보험제도 및 의료환경이 병원과 의사들의 참다운 진료를 어렵게 하고 결국 환자들의 피해로 이어진다는 것이 의사들의 진단이다.

25일 오후 서울중앙병원 중환자실. 환자를 돌보던 고윤석(高允錫)교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매일 빈 병상 없이 환자를 돌본 결과가 15억8000만원의 적자였다. 수지상 적자보다 더 참담한 것은 보험급여의 제약이다. 정부에선 혈압유지 주사제 노르에피네프린을 하루 4병 이상 쓰면 치료비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를 앞에 두고 의사가 일일이 보험급여 여부를 따질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정부의 진료비 심사기준을 무시하고 투약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병의원의 수지 악화로 연결된다.

고교수는 한때 병원이 적자를 보면 어쨌든 환자는 이익이라고 여겼지만 요즘은 환자들도 이 같은 의료현실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지혈제 트롬빈은 수술과정에서 2, 3병이 필요하지만 정부는 1병에 한해 보험을 인정한다.

고름을 몸밖으로 뽑아내는 튜브는 하루 10번을 갈아도 1번 쓴 것만 인정한다. 화상환자의 경우 하루 1번 이상의 치료는 보험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암 환자가 입원하지 않고 항암제를 맞으면 보험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원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종합병원의 병실은 언제나 부족하다.

많은 의사들은 의료인이 아닌 비전문가에 의해 결정된 의료보험 진료비 심사기준에 의해 치료범위가 결정되는 현실에 고개를 내젓는다.

“보험규정 때문에 쉽게 치료할 수 있는데도 에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염 환자의 경우 원인이 헬리코박터균이 확실해도 곧바로 항균제 오메프라졸을 처방하면 진료비가 삭감됩니다. 필요 없는 검사를 하거나 제산제를 몇 주 먹게 해야 합니다.”(박현태 내과원장)

1977년 박정희(朴正熙)정부는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평균진료비의 절반 이하로 보험수가를 책정하면서 1, 2년 뒤 수가를 현실화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23년이 지난 지금도 수가는 원가의 80%에 못 미치고 있다.

병원에선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최소 규모로 유지하려 한다. 이 때문에 환자가 응급처치를 제대로 못 받거나 중환자실을 찾아 병원을 헤매다 숨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크게 다치거나 아프면 무조건 모교 병원에 와서 본과 4학년이라고 외쳐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S대병원의 이모교수는 학생들에게 가끔 그런 얘기를 한다고 했다.

의약분업이 실시되면서 레이저수술 미용성형 라식수술 피부미용 등 비급여 항목을 위주로 하는 과목은 타격을 덜 입고 국민 건강과 직결되는 이른바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의사들은 파산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 문제다.

그러나 의사들이 정부나 제도 탓만 할 수 없다는 비판도 의료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인터넷 게시판 등에는 ‘비록 정부가 강제했다고 하지만 이를 방치한 선배 의사들의 책임도 크다’는 후배의사들의 글이 수시로 올라오고 있다.

의사들이 힘을 합쳐 의료현실을 바꿔나가기 보다는 제약회사와 결탁해 약가 마진에 안주하거나 필요 없는 검진과 과잉진료 등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비난도 있다. 의사들은 그동안 약사 간호사 의료기사 등과의 파트너십이 중요한데도 이를 소홀히 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최재천(崔載千)변호사는“의료서비스는 공공재의 성격이 있기 때문에 국민의 접근권이 용이하도록 어느 정도 규제가 필요하다. 의사들도 투명성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세제혜택 등 정부의 재정 뒷받침이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주·김준석기자>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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