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의 e컬쳐]사이버 조문과 조침문

  • 입력 2000년 8월 17일 18시 57분


휴가철에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듣고 난감할 때가 있었다. 함께 간 일행들이 있으니 무작정 일정을 취소하고 올라가기도 쉽지 않고, 또 친구 얼굴을 봐서는 안 올라갈 수도 없는 그런 경우들이 간혹 있었다. 이럴 때 멀리서라도 애도의 뜻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면 했다. 이를테면 ‘사이버 분향소’ 같은 것 말이다.

얼마전 그것이 생겨났다. 한 병원의 홈페이지에 사이버 장례식장(kbsmc.mworks.co.kr/index.htm)이 만들어져 사이버 문상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조문객들은 상주별로 마련된 방명록에 애도의 글을 남길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은행 계좌번호로 부의금을 전달할 수도 있다.

특히 외국에 체류중인 친지들에게 사이버 분향소는 때를 놓치지 않고 조의를 표할 수 있어 좋다. 그러나 직접 얼굴을 맞대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안면(顔面)’ 문화 혹은 ‘얼굴도장찍기’ 문화의 속성 때문인지 정작 사이버 조문은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 사이트방문객은 적잖게 눈에 띄지만 실제로 사이버조문을 하는 경우는 가물에 콩난 듯 하다.

그런데 아주 활발한 사이버분향소가 있다. 다름아니라 늘 보듬고 아끼던 애완물들의 넋을 기리는 사이트들이다. 패트나라(www.petnara.co.kr), 패트헤븐(www.4pet.co.kr) 등의 사이트에는 애완견은 물론 고양이 토끼 햄스터 십자매 등 다양한 동물의 넋이 기려지고 있다.이들 사이버분향소에는 꽃을 놓을 수도 있고 향을 피울 수도 있다. 물론 그리움에 가득찬 편지를 띄울 수도 있다.

몇년전 유행했던 그룹 넥스트의 ‘날아라 병아리’라는 노래가 있었다. 그 노래의 배경은 이렇다. 한 아이가 학교 앞에서 노란 병아리 한 마리를 사와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처럼, 모이도 주고 똥도 치워주며 행여라 다칠까 조심스레 보살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병아리가 갑자기 죽었다. 아이는 슬픔을 억누르며 그 병아리를 화단 옆에 묻어 줬다. 그리곤 며칠간 밥도 안 먹고 죽은 병아리만 생각하며 울었다. 누구에게나 있었을 법한 어린시절의 추억이다. 사람은 그 떠나보냄을 겪으며 속이 커간다.

그러나 누구나 정든 것이 떠나갈 때는 아프고 슬픈 것이다. 세상을 뜬 애완물들을 위한 사이버 묘지와 분향소가 마련될 수 있는 것도 이런 정서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어른들의 사이버조문이 가물에 콩난 듯 한 반면, 애완물을 향한 아이들의 사이버조문은 항상 북적댄다. 아이들에겐 그것이 더 이상 ‘사이버’ 조문이 아니라 ‘리얼’ 조문인 셈이다.

학창시절 국어교과서에서 ‘조침문(弔針文)’을 읽은 적이 있다. ‘조침문’이라하면 순조 때 유씨(兪氏) 부인이 바늘을 의인화시켜 제문 형식으로 쓴 수필이다. 자식 없는 미망인 유씨가 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다가 바늘을 부러뜨려 그 섭섭하고 애처로운 감회를 적은 글이다.

‘조침문’에는 비록 하찮게 여길 수 있는 물건이지만 그것의 망실을 마음 아파하며 조문을 적은 조선조 여인의 마음이 절절히 배어 있다. 그 조선조 여인의 마음과 세상을 먼저 뜬 애완물을 그리워하며 사이버 조문을 하는 우리 아이들의 마음은 한 줄기로 이어져 있다.

이처럼 우리가 펼쳐가는 e컬처의 세상은 미래로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과거와도 포옹하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따뜻하다. 만약 유씨부인이 지금 살아있다면 그 분 역시 ‘사이버 조침문’을 쓰지 않았겠는가.―끝―

정진홍(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커뮤니케이션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