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남찬순/용기있는 謝過

  • 입력 2000년 8월 4일 20시 20분


“비는 놈한테는 져야 한다” “비는 데는 무쇠도 녹는다”는 우리 속담은 잘못을 뉘우치고 빌면 용서를 해줄 수밖에 없다는 ‘사과 유용론’을 강조하고 있다. “사과는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미덕” “좀스러운 사람은 사과도 못한다”는 말은 사과해야 할 사람의 인물됨이나 그릇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진정한 사과는 그만큼 가치를 평가받는다.

▷국회가 여야 간에 사과문제로 ‘개점 휴업’ 중이다. 한나라당측은 국회법 날치기통과에 대해 “민주당이 솔직히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고 민주당측은 아무래도 그런 사과를 하기가 껄끄러운 모양이다. 사과를 한다 한다 하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을 두고 이만섭(李萬燮)국회의장은 “지금은 한 정당이 다른 정당에 대해 사과할 때가 아니라 국민에게 사과할 때”라며 국회의장인 자신이 국민에게 사과하겠다고 한다. 사과문제가 무슨 축구공처럼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을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는 중이다.

▷사실 정치판의 사과는 시정의 사과와는 다른, 독특한 측면이 있다. 사과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렇게 잘못을 인정한다면 누가 다음선거에 표를 주겠느냐는 식의 명분론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사과에 극도로 인색하거나 개인적으로 만나서는 잘못됐다면서도 밖에 나와서는 그런 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시급한 민생법안이 산적해 있는 데다 남북관계 등 주변환경이 급격히 돌아가고 있다. 국회도 여름휴가를 맞은 듯 낮잠만 자고 있을 때인가.

▷더욱 한심한 것은 사과문제로 국회가 파행으로 치닫는 것이 오히려 잘됐다는 듯한 분위기다. ‘시급한 민생법안 처리’를 이유로 단독국회라도 강행하겠다던 민주당은 소속의원 3명이 당명을 저버리고 미국 여행길에 오르자 국회를 아예 포기한 듯 손을 놓고 있다. 여야의원 20여명이 이미 출국한데다 수십 명이 더 외유 비행기표를 챙기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 정치권 수준으로 볼 때 국회에 ‘용기 있는 사과’ ‘진정한 사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남찬순 논설위원>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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