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방송독립과 장관의 '월권' 시비

  • 입력 2000년 8월 3일 23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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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지상파 TV가 보여주고 있는 과도한 선정성과 폭력성은 반드시 누구라도 나서 제기했어야 할 문제였다. 그래서 엊그제 박지원문화관광부장관이 강경한 어조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밝힌 것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박장관의 발언은 문화부의 권한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새 방송법 시행에 따라 방송 정책의 최고 집행기구는 엄연히 방송위원회이며 방송정책과 관련해 과거 문화부가 갖고 있던 권한은 대부분 방송위원회로 넘어갔다. 특히 TV프로그램의 선정성 여부를 가려내고 제재조치를 가하는 것은 방송위원회의 고유 권한이다. 이 점에서 문화부장관이 직접 ‘직을 걸고’ 해결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월권’시비를 일으킬 만하다.

박장관 발언이 있은 후 불과 몇시간 뒤 방송위원회 위원장과 방송 3사 사장들이 사전 교감이라도 있었던 듯 지지의사를 표명한 것도 구시대적인 모습이다. 이번 일로 고유 권한을 침해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방송위원회가 방송사 사장들과 함께 박장관의 발언을 한목소리로 지지한 모양새는 아무래도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5년여 동안의 토론 끝에 통합방송법을 제정하고 새 방송위원회를 만든 것은 방송의 독립성 확보가 가장 큰 목적이었다. 국민이 어렵게 ‘쟁취’해낸 기구인 만큼 방송위원회는 스스로 당당한 자세와 권위를 지켜나가야 한다. 그러나 방송현안에 대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을 보인 방송위원회의 이번 자세는 실망스럽다.

지난 3월 새 방송위원회가 구성됐을 때 방송계 일각에서는 방송위원들의 인적 구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외부 영향을 배제하고 독립성을 지켜내기에 미흡하다는 것이었다. 이번 일로 당시 우려가 현실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방송의 선정성 문제는 일시적인 바람몰이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과거 정권에서도 비슷한 문제 제기가 여러 번 있었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던 것은 그 밑바닥에 시청률 경쟁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새 방송법은 방송위원회에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방송위원들은 이 권한을 제대로 활용하여 지나친 시청률 경쟁에 제동을 거는 등 방송정책에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이번처럼 정부에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을 더 이상 보여서는 안된다. 정부도 방송 독립과 관련해 오해를 살 만한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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