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고 으시대기]김승옥 '무진기행(霧津紀行)'

  • 입력 2000년 7월 28일 14시 06분


◆〈서울 달빛 0장〉에서 '0章'의 의미?

김승옥은 단지 몇 편의 빛나는 단편으로 독자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몇몇 단편들은 주로 1962년에서 1965년 사이에 씌어졌다. 그 이후로 주로 자신의 소설〈무진기행〉을 각색하면서 인연을 맺은 영화일에 관여했다. 작가 자신의 술회에 의하면 생계를 위한 방편이었다. 1970년대에《문학사상》 주간을 맡고 있던 이어령은 영화각본만 쓰고 소설쓰기를 게을리하는 김승옥을 안타깝게 여겨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소설집필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어령의 애정과 관심 덕택에 창작된 작품이 바로〈서울 달빛 0장〉이다.

이어령은 당시로서는 최고급 호텔이었던 서린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돈걱정은 하지 말고 그 방에서 소설 한 편을 완성하고 나오라는 호의를 베풀었다. 김승옥은 글자 한 자 못 쓴 채, 하루가 지날 때마다 마치 모자라는 돈으로 택시를 탔을 때처럼 미터요금이 오를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듯 비싼 호텔비가 올라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결국, 며칠 후 원고지 한 장 쓰지 못한 채 호텔을 탈출했다. 그러나 이어령은 이에 실망하지 않고 1977년, 장충단공원 근처에 있는 파크호텔에 방 둘을 잡아놓고 한 방에서는 김승옥에게 소설을 쓰게 하고 옆방에는 당시《문학사상》편집부장이던 작가 서영은씨와 편집부 기자이던 이명자씨를 투숙시켜 김승옥이 백지에 갈겨 쓴 원고를 원고지에 정리하도록 하였다. 원고를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김승옥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를 시켰던 것이다.

김승옥은 장편으로 구상하고 있던 〈서울 달빛〉의 프롤로그 150장을 써내고 서장(序章)이란 뜻에서 제1장, 제2장 하듯이 제0장이라고 적었다. 제목은 그대로 '서울 달빛'이었다. 그런데 이어령은 "김승옥이한테서 다음 제1장 원고를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이 0장만으로도 단편소설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으니……" 그리고서는 본문 맨 처음에 붙어야 할 0장이라는 낱말을 제목 다음에 붙였다. 김승옥은 책이 나온 다음에야 그 괴이한 제목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령의 예언대로 김승옥은 〈서울 달빛 0장〉 다음인 제1장을 아직까지 못 써내고 있다.

◆ 세계의 폭력성에 맞서는 反질서주의

김승옥은 1941년 12월 23일 일본 오사카에서 아버지 김기선과 어머니 윤계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승옥의 가족은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전남 진도에서 수개월 지내다가 본적지인 전남 광양에 일시 거주하다가 1946년 순천으로 이사하여 정착하게 됐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되어 부친이 사망하고 이후 여수로 거주지를 옮김에 따라 여수 종산국민학교(현재 중앙국민학교)로 전학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김승옥의 가족은 경남 남해로 피난했다. 수복 후 순천북국민학교로 전학했다. 1951년 유복자로 태어났던 김승옥의 셋째 여동생 혜경이 죽었다. 그 후 그는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우 돈독한 신앙생활을 했다.

김승옥이 유년·소년 시절에 겪었던 여순반란 사건, 6·25 등은 가까운 혈육과 연루된 사건으로서 대학 입학 당시 경험하게 되는 4·19와 함께 그의 문학과 신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이 된다. 김승옥은 소설에서 전쟁의 상황을 리얼하게 그려낸다든지 혁명의 이념을 수용한 문학을 창작해냈던 것은 아니지만 인간과 사회를 보는 시각의 미묘한 조정을 통해 '인식론적 전환'을 이루어 냈다.

1952년 월간잡지《소년세계》에 동시를 투고하여 게재된 것을 계기로 이후 동시, 콩트 등의 창작에 몰두하며 문학청년으로 성장하게 됐다. 1953년 순천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시절 교지편집에 관계하기도 하며, 학교 대표 배구선수와 학생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순천고등학교)에도 이와 똑같은 활동을 했다.

1960년 서울대 문리대 불문학과 입학해 4·19를 체험한다. 문리대 교내신문《새세대》기자활동을 시작하여 졸업 때까지 활동했다.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한국일보사에서 발행하는《서울경제신문》에 연재만화를 아르바이트로 그려 학비를 조달했다.

1961년 독문과의 김광규, 김주연, 염무웅, 이청준, 영문학과의 박태순, 정규웅, 불문학과의 주섭일, 하길종, 김치수, 김현, 미학과의 김지하 등과 문리대 문학의 밤, 시화전에 참가하며 친교했다.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생명연습〉이 당선됐다. 김현, 김치수, 염무웅, 서정인, 최하림 등과 함께 동인지 《산문시대》를 발간한다. 이후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였다.

1965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다. 그 해 〈서울 1964년 겨울〉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1966년 〈무진기행〉의 영화각본 집필을 계기로 영화계에 관계하기 시작하여 1967년에는 김동인의〈감자〉를 각본, 감독했다. 1970년 김지하가 〈오적〉사건으로 투옥되자 이호철, 박태순, 이문구 등과 구명운동을 펼쳤다. 1967년 결혼한 백혜욱과의 사이에서 장남 융세(1971년), 차남 융태(1974년)을 얻었다. 이후 주로 영화 일에 관계했다.

1977년 〈서울 달빛 0장〉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다시 소설 창작에 주력하려 하나 1980년 광주학살 소식을 접한 뒤 창작의욕을 상실, 소설쓰기를 중단했다. 1981년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극적 체험을 한 후, 여러 해 동안 성경과 그 주석서 독서와 기도생활, 인도로의 전교활동 등 돈독한 기독교인으로 생활했다.

◆김승옥(1941∼ ) : 감수성의 혁명, 교훈주의에 대한 반발 4·19세대와 60년대 문학의 기수

아내의 권유로 '나'는 무진으로 떠난다. 젊고 부유한 미망인과 결혼을 했고, 얼마 후 제약회사 전무가 될 서른세 살의 '나'는 어머니의 묘가 있고, 젊은 날의 추억이 있는 무진으로 간다. 짙은 안개, 그것은 무진의 명물이었다. 과거에도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면 무진에 오곤 했었다. 그러나 늘 어두운 골방에서의 화투와 불면과 수음, 그리고 초조함이 있었을 뿐이었다.

무진에 온 날 밤, 중학 교사로 있는 후배 '박'을 만난다. 그와 함께 지금은 그곳 세무서장이 된 중학 동창 '조'를 만난다. 그는 '손금이 나쁜 사내가 스스로 손금을 파서 성공했다.'는 투의 얘기에 늘 감격해 하던 친구다. '조'를 만나는 자리에서 하인숙이란 음악 선생을 소개받는다. 대학 졸업 음악회 때 '나비 부인'의 아리아 〈어떤 개인 날〉을 불렀다는 그녀는 술자리에서 청승맞게 유행가를 부르고, 둘만이 함께 있을 때 무진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을 '나'에게 간청한다. '나'는 그녀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한다.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한다.

이튿날, 어머니 산소에 다녀오는 길에 방죽 밑에서 술집 여자의 시체를 본다. 바다로 뻗은 방죽, 거기 '나'가 과거에 폐병으로 요양했던 집에서 하인숙과 정사를 갖는다.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끝내 말하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 아내로부터 온 급전(急電)이 과거의 의식에 빠져 있던 '나'를 일깨운다. 하인숙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쓰나 …

허명숙<국문학박사 / 북코스모스 가이드북 작가>http://www.bookcosm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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