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영균/경제관료는 말을 아껴야

  • 입력 2000년 7월 2일 19시 20분


한달 전쯤 현대건설 등 현대그룹이 자금난을 겪고 있을 때였다. 건설교통부는 해외 건설발주기관에 편지를 띄웠다. 자금악화설이 도는 현대건설은 아무런 탈이 없을 것이니 종전과 같이 발주를 해달라는 게 요지였다.

정부가 나서 민간기업의 신용을 해명하게 된 사정은 일단 이해가 간다. 아마도 한국의 대표적인 건설회사가 자금악화설 때문에 해외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니 정부라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부의 의도와는 달랐다. 얼마나 어려웠으면 정부까지 나서 해명을 했겠느냐는 게 금융계의 반응이었다. 그 후 편지 덕분에 현대건설의 신용도가 높아졌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이렇게 보면 정부의 이런 태도는 섣부른 감이 있다.

정부 관료들의 발언은 본래의 취지와는 다른 결과를 빚는 적이 많다. 외환위기 전 모 경제수석이 “은행이 망할 수도 있다”고 한 말도 그런 예에 속한다. 은행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점에선 지극히 정상적인 얘기다. 그러나 외국투자자들은 한국의 금융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걸 시인한 발언으로 생각했다는 게 문제다.

최근 회사채와 기업어음의 유통이 막히고 중견기업의 자금사정이 악화된 이후 정부 관료들의 발언도 지나치다 싶은 게 많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얘기지만 되레 악화시키는 경우가 그렇다.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해놓고 뒤늦게 주워담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앞으론 은행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다”(이헌재 재정경제부 장관)거나 “은행 합병이 아니라 통합”(이용근 금융감독위원장)이라고 한 발언들이 대표적이다. 불과 한두달 전에 은행 합병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강조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종합금융사는 절대로 부도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정부 고위층의 얘기도 그 중 하나다. 그 말이 나온 지 불과 1주일만에 일부 종금사가 은행에서 자금을 지원받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결국 3, 4개 종금사는 문을 닫을지도 모를 상황이 돼 버렸다.

경제관료들의 이런 발언은 정부의 신뢰도만 떨어뜨린다. 나아가 정책의 효과를 반감시키고 비용만 더 들게 할 뿐이다. 어떤 경제관료는 아침저녁으로 강의와 강연하러 다니느라 바쁘다고 한다. 장관이 직접 나서 적극 대응하라는 대통령의 질책 이후에 경제팀의 발언이 늘었지만 오히려 혼란스럽다는 게 민간 경제계의 지적이다. 정책은 기자회견을 통해 정확히 발표할 일이다. 조찬강연회에서 적당히 흘려놓고 반응을 떠볼 일이 아니다.

경제관료들의 발언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는 미국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사례가 잘 보여준다. 미국 월가에는 그의 발언을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의 말 한마디가 주식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지난주에도 미국 월가에선 그린스펀 의장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금리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린 것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올렸던 금리를 이번에는 올리지 않았다. 주식시장의 관심은 벌써 다음 인상시기에 쏠렸다. 그러나 그린스펀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짧은 발표문이 나왔을 뿐이었다.

박영균<금융부장>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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