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속으로]이문구 소설집 '내 몸은…'

  • 입력 2000년 6월 16일 18시 50분


생태주의 문학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있는 그물망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그 중 일부만 파손되어도 그 고통은 전체로 펴져 나가고, 그물의 기능은 상실된다. 나무 역시 하나가 훼손될 때 숲 전체가 파괴될 수도 있다. 그래서 생태주의 작가들은 숲을 이루는 나무들을 즐겨 작품의 주제로 다룬다.

‘유자소전’(1993) 이후 7년만에 나오는 이문구의 소설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문학동네)의 주요 소재와 상징 역시 ‘나무’다. 일곱 편의 나무 연작소설과 한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집에서 작가는 인간의 다양한 삶의 양태를 각기 다른 나무들에 비유하고 있다.

▼다양한 인생 나무에 비유▼

그러나 작가가 관심을 갖는 것은 전나무나 낙엽송처럼 굵고 우뚝 솟은 근사한 나무들이 아니라, 찔레나무나 개암나무나 싸리나무 같은 시시하고 초라하며 볼품없는 나무들이다.

이는 그가 도시의 잘 나가는 ‘상행선’ 인생들보다는, 농촌의 소외된 그러나 똑같이 중요한 ‘하행선’ 인생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의 말대로, 비록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가치가 희미하지만, 돈 없고 힘없는 일년살이들도 숲을 이루는데는 꼭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다양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문구의 문학세계는 분명 생태주의적이다. 예컨대 서울을 떠나 낙향한 주인공의 실망과 좌절을 그린 ‘장동리 싸리나무’나, 민족 상잔의 비극을 다룬 ‘장석리 화살나무’는 모두 파괴된 이 나라 정신 생태계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과 회한에 뿌리 박고 있다. 그래서 이문구는 민초들의 삶을 나무에 비유하며, 다시 한번 훼손된 숲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래서 ‘내 몸은...’의 각기 다른 이야기들은 서로 모여 궁극적으로는 근대 민족사가 담긴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만들어낸다. 그러한 주제와 서사구조 속에서 이 작품은 마치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스버그, 오하이오’처럼 시골 농촌 사람들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관료-기회주의 풍자▼

작가 이문구가 감싸안는 것은 늘 제외되고 소외되지만, 그러나 나무처럼 원초적 생명력으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비주류 민초들의 삶이다. 그러므로 그가 능숙하게 구사하는 향토 사투리는 또 하나의 문화, 또 하나의 담론으로서, 지배문화의 표준화와 규범을 해체하는 효과적인 전략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그 사투리가 어느 지방 것인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문구는 단순히 향토색 짙은 지방작가나 지역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배문화의 정통성과 근엄함을 비웃는 문학에 해학과 풍자가 없을 수 없다. 과연 작가는 약자들의 삶을 억압하고 조롱하는 관료주의와 기회주의를 김유정 식의 수준 높은 해학과 풍자로 비판한다. 이문구의 비판은 비단 지배문화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그는 권력에 복종하거나 스스로를 비하하는 민중들의 천민의식과 물질주의적인 천박한 세태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해학적이기 때문에 이문구의 비판은 늘 문학적으로 형상화된다. 심지어는 ‘장곡리 고욤나무’의 자살한 늙은 농부의 비극조차도 눈물을 자극하는 감상주의 대신 감정이 배제된 씁쓸한 웃음을 유발한다.

▼민초들의 병든 마음 위로▼

문학이 기본적으로 스토리텔링이라면, 이문구는 능숙한 이야기꾼이다. 그리고 능숙한 이야기꾼은 우리의 상처입고 병든 마음을 치료해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일곱 개의 보잘것없는 나무들이 사실은 모두 상처 치유력을 가진 한약재들이라는 사실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마지막에 수록된 ‘더더대를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찾아 헤매는 어린 시절의 까마귀나 언년이나 더더대 역시 현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소중한 정신적 약재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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