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철원의 끊어진 철로에 선 탈북연예인 김혜영

  • 입력 2000년 6월 14일 19시 45분


“(김)명애야, 평생 친구하자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 하지만 이제 곧 환하게 웃으면서 이야기 꽃으로 밤을 지새울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네가 있는 저편 하늘과 땅이 오늘처럼 가깝게 보인 적은 없어.”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분단 55년만에 남북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두손을 마주잡은 13일 오후. ‘북에서 온 여배우’로 알려진 김혜영(25)은 끊어진 철로와 열차의 잔해가 남아 있는 강원 철원군 월정리역에 서 있었다. 가족과 함께 북한을 떠나 98년 8월 국내에 정착한 그가 평양연극영화대학 동기생인 단짝에게 그리움과 눈물로 쓴 마음의 편지를 띄웠다.

그는 “TV를 통해 두 정상이 악수를 나누는 것을 지켜봤다”며 “그래서인지 몰라도 녹슬고 부서진 열차가 벌떡 일어나 힘차게 달려 내 얘기를 북녘 땅의 친구에게 전할 것만 같다”고 말했다.

낡은 월정리역사로 들어선 그는 ‘철마(鐵馬)는 달리고 싶다’는 문구가 쓰여진 대형 선전판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거기에는 서울 104㎞, 그리고 갈 수 없었던 지명들과의 거리(距離)가 적혀 있었다.

함흥 247㎞, 청진 653㎞….

“청진, 청진이예요. 653㎞. 얼마나 걸릴까요.”

떠나온 그곳, 아니 두고온 그곳이다. 그리도 그리웠을까.

함경북도 청진. 12세 때 평양학생소년예술단에 입단한 뒤 주로 평양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청진은 유년기의 추억이 잔뜩 배어 있는 고향이었다.

“바로 바다가 보이는 곳에 집이 있었습니다. 여름날이면 아빠 손을 잡고 동생들과 함께 헤엄치러 자주 나갔습니다.”

이날 낮 12시경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철원까지, 철원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그의 여정은 차가 막혀 7시간여가 걸렸다.

그가 출연중인 SBS 드라마 ‘덕이’의 촬영 때문에 매주 2회씩 왕복하는 낯익은 길이었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사람도, 길도 달라 보였다. 남북 정상의 첫 만남이 주는 그 강렬하면서도 가슴이 쿵쿵 뛰는 긴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월정리역의 동강난 철로처럼 그가 북을 떠난 뒤 절반으로 살아온 가슴앓이의 세월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한쪽에서는 ‘탈북자’이고, 또다른 한쪽에서는 아무리 따뜻한 눈길이 있어도 ‘북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남모를 자책감 탓일까.

그에게 분명 남쪽은 ‘기회의 땅’이었다. 지난해 6월 첫 출연작인 악극 ‘아리랑’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했고 CF도 찍었다. 3주전 ‘장미정원’이라는 그룹 이름으로 음반도 냈고 ‘덕이’로 탤런트로도 데뷔했다.

“아마 내가 북한에서 오지 않았다면 짧은 시간에 이런 행운들을 만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말투가 어색해도, 연기가 좀 이상해도 너그럽게 봐주는 관대한 눈길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

그래도 뭔가 허전했다. ‘명애’ 등 단짝 친구들의 생일이라도 되면 더 했다. 얼마전 서울을 다녀간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공연을 TV를 통해 지켜보다 학생 시절 노래를 지도하던 낯익은 두분 선생님의 얼굴이 보이자 “어머, 선생님”이라며 눈물이 왈칵 솟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남으로의 선택이었지만 그것은 또하나의 반쪽을 두고 떠나야 하는,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두 정상이 남과 북은 물론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그 순간 서울 중계동 그의 집에서도 아버지 김두선씨(56)와 어머니 최금란씨(55)가 역시 말없이 두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그의 어머니의 55번째 생일이자 북을 떠나서 맞은 두 번째 생일이었다. 두 사람은 남북 정상회담이 발표되자 신문을 꼼꼼히 챙기면서 “정말 정상회담이 성사될까”라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김혜영은 “북쪽에 외가 식구들이 여럿 있다”면서 “어머니가 TV를 보면서 통일이 되어 건강하게 다시 형제들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겠느냐며 눈물을 적셨다”고 전했다.

그의 꿈은 ‘문화 통일’의 작은 씨앗이 되는 것이다. 그는 최근 평양교예단의 방한을 보면서 작은 공연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내는 놀라운 가능성과 힘을 발견했다고 한다.

“문화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분단 55년으로 생긴 사람들의 깊은 상처를 빨리 씻어주고 치유할 수 있는 ‘명약’이라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이 함께 하는 어떤 작품이든 연기자로 참여하고 싶습니다. 오늘 철원 왕복에 7시간이 걸렸죠. 이제 그 시간이면 고향 청진에 갈 날이 멀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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