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칼럼]이창남/獨 베텔스만의 국내진출 유감

  • 입력 2000년 5월 24일 18시 30분


독일 미디어 재벌 베텔스만이 국내 출판유통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는 소식(동아일보 4월 12일자 보도)은 새삼 1998년 IMF의 '수혈'을 받던 당시 우리 출판시장의 상황을 되새겨보게 한다.

일종의 파국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던 당시의 상황은 대충 이렇다. 현금이 마르고, 소위 문방구 어음의 할인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보문당을 비롯한 대형 도매점들이 부도를 냈다. 잇따라 인쇄비, 광고비를 지불할 수 없었던 많은 출판사들이 부도 혹은 부도 직전까지 내몰리면서 내로라하는 이름있는 출판사들까지 하루 앞 자신의 운명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 모 출판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필자는 두달 가량 휴직 상태에 들어가 집에서 무협지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무협지 속의 그것이랑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형 도매점들 가격경쟁이 파국 워인▼

출판사 운영진들은 매일같이 모여서 '이번에는 어디 도매점에서 부도가 날 것인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대책은 제살 깎아먹기, 말하자면 직원감축과 월급삭감이 전부였다. 대형도매점 사장들은 부도를 내는 순간, 신출귀몰하게 잠적해 종적이 묘연해졌다. 설사 그들을 붙잡는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대책이 있을 수가 없었다. 광고비와 인쇄비를 독촉하는 전화가 본격적으로 울리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말하던 편집장의 근심어린 목소리, 우리는 우리 정수리를 향해 떨어질 최후의 일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약 2년이 지난 지금,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새삼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의 출판 유통구조는 그동안 얼마나 개선되었는지, 변화에 대응할 능력과 여건은 갖추었는지.

당시 파국의 원인은 무엇보다 대형 도매점들 사이의 가격 경쟁이었다. 도매점들은 무리하게 가격할인경쟁을 했고, 젖줄을 대일 곳이 마땅찮던 출판사들은 울며겨자먹기로 그것을 묵인했다.

이 가격경쟁은 결과적으로 도매점들의 재무구조를 부실하게 만들었고, 사회에 현금이라는 윤활유가 마르면서 급속히 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나마 출판사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소수 대형서점들이었다. 그러나 이 서점들은 지역상권의 이익 때문에 지방으로 진출할 길이 막혀 있었다. 일부 대도시에서 판매되는 물량만으로 1만2천여개 출판사들의 든든한 뒤가 되어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주먹구구식 결제관행이 계속되고 있었다. 할인조차 되지 않는 문방구 어음이 출판계에서는 버젓히 유통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순간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그 어음들은 돌고 돌면서 이미 연쇄부도라는 재앙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도매점들의 부도는 이처럼 예고되어 있었던 일이었다. 거기에 젖줄을 대고 있던 출판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는 웃지 못할 희극 또한 그랬다. 그렇지만 지식의 생산과 소비가 그처럼 취약한 유통구조 위에 서 있었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한차례 쓰라린 파국이 지나가면서, 출판시장은 개방되었고, 베텔스만은 유효적절한 시점에 한국으로 진출했다.

▼도서정가제 협정 추진 "희소식"▼

현재 국내 서점들과 출판사들은 도서정가제 협정을 맺는다고 한다. 뒤늦게나마 적절한 조치가 아닐 수 없다. 국내 단행본 시장이 지금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도서정가제가 부분적으로나마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판매, 통신판매 등이 본격화될 경우 도서정가제는 허울만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인터넷판매는 소위 서점 진열비용을 줄이면서 그 비용을 도서 가격에서 제하는 방식의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이미 '아마존' 등 인터넷 서점들의 성공을 시작으로 인터넷 판매는 전통적 서점들의 입지를 위협하면서 점점 일반적인 판매 방식으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회원제 통신 판매의 경우, 한국에서는 익숙하지 않지만 이미 독일을 비롯한 유럽지역에서는 일반적인 판매 방식이다. 말하자면 유통업체가 출판사로부터 판권을 사서 자신들의 판본을 제작해서 판매하는 것이다. 즉 판권, 제작, 판매까지 유통업체에서 관리하고, 여기에 출판사는 소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이 유통의 형식은 인터넷 판매보다 더 파격적인 가격파괴를 수행할 수 있다.

▼베텔스만 한국진출은 변화의 서곡▼

왜냐하면 인터넷 판매와는 달리 가격을 정하는 주체가 곧 유통기관이 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통신판매용으로 제작된 책들은 다른 판본의 30% 선에서 거래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물론 여기서는 여러 판본들이 공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서관에서 소위 값비싼 판본들도 충분히 소화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처럼 대중 독자들의 수요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유통구조에서 가격은 곧 경쟁력이다.

변화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도서정가제가 허울만 남게될 경우 책은 종전보다 더 심각한 시장의 논리 속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경쟁을 헤쳐나가지 못하는 중소규모 서점과 도매점들은 자연 도태될 것이며 출판사들은 넉넉하고 믿을만한 유통기관에 기꺼이 판권을 맡기게 될 것이다.

베텔스만의 한국진출은 이러한 변화의 서곡을 알리고 있다. 그에 대한 출판계의 대응은 대체로 안일해 보인다. 그들은 베텔스만의 승산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반면 서점들을 과신하고 있다.

국내 서점들은 외국에 비교해볼 때 수가 많고, 규모가 큰 편이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책을 비치해 놓는 대형서점은 외국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서점 문화는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서점들에 의지할 수 있는 때는 조금씩 지나가고 있다고 본다. 대형 서점들 역시 새로운 유통형식에 창조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한 독자들을 불러모으기 힘들어 질 것이다.

출판 환경은 편집, 제작, 판매가 선명히 분할되어있는 현단계의 구조에서 점점 그 과정들이 한가지로 통합되는 구조로 변화하고 있다. 미래에는 독자들이 원고들을 선택하고, 출판사는 그 원고들을 모아서 책으로 엮어보내주는 주문형 도서의 형식도 등장하게 될 것이다. 베텔스만의 회원제 통신 판매의 형식은 가격 경쟁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제작과 유통을 통합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미래적 출판 유통 양식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지금은 편협한 지역주의를 내세울 때는 아니다. 국내 도매점과 서점들간의 경쟁이 문제라기보다는 국제적 유통기관과의 경쟁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변화하는 출판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창조적 복안을 고안하고, 자기변신을 시도해야 할 때다.

이것이 베텔스만의 한국 진출이 상기시키는 생산적 의미, 혹은 생산적 자극이 아닐까 한다.

이창남<동아닷컴 넷칼럼니스트>blaublum@zedat.fu-berli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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