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대통령이 말해야 움직이나

  • 입력 2000년 5월 17일 19시 34분


유적 훼손 문제로 말썽을 빚은 풍납토성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은 잘한 일이다. 정부는 16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유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면 돈이 문제가 아니다"는 취지의 말을 한 뒤 발빠르게 '풍납토성 보존, 주민재산권 보상'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문화재위원회가 이 지역에 대한 추가발굴 및 보존여부를 정식으로 결정하는 순서를 거쳐야 하지만 위원 대부분이 '보존'에 이의가 없어 이는 요식행위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쾌도난마 식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을 그동안 정부 관련부처는 왜 못했느냐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학계가 풍납토성 유적 훼손을 우려한 지 이미 오래고 유적지 내 재건축지역 주민들의 민원이 제기된 지도 오래지만 관련부처들이 문제해결을 위해 열심히 뛴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문화재청 문화관광부 서울시는 주민 편익은 외면한 법조항이나 재원문제를 핑계로 서로 떠넘기기를 해왔다. 그러다 대통령이 한마디하자 부랴부랴 기자회견을 한다, 대책을 내놓는다며 바쁘게 움직였다. 정부 내의 유기적 시스템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매향리 미군기 폭탄투하사건의 경우도 그렇다. 사건이 나자 정부 관련부처는 철저한 진상조사에 착수하기보다 주민들이 문제를 확대하려 한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본질적인 문제를 보지 않고 파문이 확산되지 않기만을 바라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시민단체들이 들고일어나고 급기야 대통령이 "정부는 미군과 협력해 이같은 사건과 주민피해가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하자 뒤늦게 미군과 합동조사를 벌인다는 등 부산을 떨고 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며 정부가 과연 제할일을 적시에 알맞게 챙겨 하는 건지, 혹시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긴다. 그러잖아도 총선 이후 내각이 무기력증에 빠지고 공무원들의 일손이 더뎌졌다는 얘기가 많다.

그런 판에 일이 터질 때마다 관련부처는 우왕좌왕하고 대통령의 질책이 떨어진 다음에야 바쁘게 움직이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제대로 된 행정부라면 관련 부처가 체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주무부처의 문제제기와 유관부처의 협조나 문제점 보완작업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주무부처부터 문제제기에 소극적이고 유관부처들도 내 일이 아니라며 손을 들고 있다 문제가 커지면 대통령이 나서서 수습하는 행정시스템은 분명히 전근대적이다. 지금 이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행정무기력증은 더 심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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