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뉴스인지…드라마인지…

  • 입력 2000년 5월 9일 18시 58분


신문 방송에는 뉴스와 엔터테인먼트가 병존한다. 소비자의 욕구가 다양한 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요 며칠 언론에서 나타난 ‘뉴스의 드라마화 현상’을 보면 둘 사이의 균형이 크게 무너졌다는 느낌이 든다. 무기 로비스트 린다 김과 이양호 전 국방부장관의 ‘부적절한 관계’에 관한 의혹과 소문, 그리고 ‘연예인 매매춘’을 둘러싼 연예인노조와 SBS의 힘 겨루기에 대한 보도를 보면 분명 그렇다.

솔직하게 말해 나는 천문학적 액수의 무기 구입 결정권을 쥐고 있었던 국방부장관과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서 ‘미모’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여성 로비스트가 어느 호텔 객실에서 다섯 시간 동안 무얼 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도대체 우리 군이 어떤 절차와 방법을 통해 무기 구입 결정을 내리는지가 궁금하다. 그래서 인터넷 기사검색 엔진에서 린다 김을 치고 검색 명령을 내렸더니 1997년 이후 국내 신문의 린다 김 관련 기사가 73건이나 떴다. 하지만 아쉽게도 군의 의사결정 절차와 방법에 관해 읽을 만한 기사는 거의 없다. 사실관계를 추적함으로써 린다 김의 로비가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준 기사도 한 손으로 꼽을 만큼 드물었다.

그럼 나머지는 다 뭘까? 장군과 로비스트 사이에 오간 ‘정감 넘치는 러브 레터’, 장군에게 ‘부적절한 관계’의 존재 여부를 추궁하는 인터뷰, 기자들이 밤낮으로 진을 친 논현동 린다 김의 집 앞 풍경 소묘, 린다 김의 탈수증세, 생활보호대상자로 살아가는 린다 김의 부모, 린다 김 아버지의 재혼으로 인한 부녀간의 갈등, 뭐 대개 이런 것이다. 한반도의 가장 큰 산맥과 가장 아름다운 산을 본떠 이름을 지은 국가적 방위력 증강사업 관련 의혹을 이렇게 보도해도 좋을 것인가.

장군은 로비스트를 ‘나쁜 여자’로 몰아세우면서 자기가 꼬임에 빠져 ‘부적절한 관계’를 두 번 맺었다고 시인했다. 남편과 자녀를 가진 여성임을 강조하는 린다 김은 오히려 끝없이 ‘성적 괴롭힘’을 저질렀던 장군이 있지도 않았던 ‘부적절한 관계’를 거론함으로써 자기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비난한다. 도대체 어느 쪽이 진실일까? 나는 관심이 없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성능 좋은 무기를 제값에 샀다면야 두 사람이 ‘선’을 넘었든 말든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 군의 무기 구입 의사결정이,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는 장관과 로비스트의 ‘부적절한 관계’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구조였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그래야 앞으로는 돈과 ‘육탄 공세’에 흔들리지 않는 의사결정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 아닌가. 장관이 로비스트와의 사적 관계를 이유로 특정 무기 공급업자를 선정했다면 그것은 명백히 부당한 권력 남용이며, 이러한 권력 남용을 막는 수단은 투명한 의사결정 시스템밖에 없다.

연예인 매매춘에 대한 보도 역시 본말이 전도됐다. 연예인과 재벌2세가 얼마를 주고받으면서 어떻게 하룻밤을 즐겼든 그건 나와는 무관한 그들의 사생활이다. ‘돈 많은 한량’과 ‘돈 밝히는 예쁜 여자’ 사이의 거래는 사유재산 제도가 발생한 후 늘 있었던 일이다. 옛날처럼 권력자의 술자리에 억지로 끌려나간 것이라면 모를까, 서로 배짱이 맞아서 저지른 도덕적 일탈행위를 굳이 파헤쳐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 걸 알아야 할 권리를 가진 국민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SBS의 ‘뉴스추적’은 시청률에 눈이 멀어 연예인을 집단적으로 매도했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연예인노조는 여성 출연자들에게 ‘성 상납’을 요구한 PD 3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노라고 은근히 방송사를 협박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것은 연예인 매매춘보다 훨씬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다. 출연자를 선정하는 권한을 악용하는 명백한 권력남용이자 인권유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이것을 아주 작은 가십성 단신으로 처리했다.

국민이 알아야 하고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것은 유명인사들의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권력의 오남용을 막지 못하는 불투명한 의사결정 시스템임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유시민(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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