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세일즈맨의 죽음' 윌리역 이순재 직장인관객과 정담

  • 입력 2000년 4월 19일 19시 14분


1978년 서울 세종문화회관 소극장 개관기념 공연이었던 ‘세일즈맨의 죽음’. 극단 실험극장의 창립동인이었던 배우 이순재는 당시 45세로 63세의 늙은 세일즈맨 윌리 역을 맡았다. 22년만에 다시 이 연극의 주인공을 맡은 이순재는 극 중 나이와 비슷한 66세로 인생의 연륜이 쌓인 연기를 다시 펼쳐 관객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30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소극장.

촉촉한 봄비가 약간이나마 대지를 적셔주던 15일 오후. 이 시대의 평범한 샐러리맨 4명이 극장을 찾았다. 대학 친구 또는 선후배 사이인 도기탁(31·현대산업개발 대리) 맹지열(31·유한킴벌리 대리) 박한진(31·기업은행 계장) 고소연씨(27·여·텍스링크 사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의 파고를 넘어 최근의 벤처열풍까지 무한 생존경쟁을 겪고 있는 이들이 ‘세일즈맨의 죽음’을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일까? 공연을 마치고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이순재와 젊은 샐러리맨들이 맥주잔을 기울이며 나눈 대화는 밤 12시가 넘도록 계속됐다.

△이순재〓22년 전 공연 때만 해도 ‘세일즈맨의 죽음’이 관객에게는 어렵게 느껴졌지요. 당시엔 ‘퇴출’에 대한 개념조차 이해가 안됐으니까요. 그러나 IMF체제를 겪고 난 후 열린 이번 공연에선 관객이 작품내용을 피부로 절감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박한진〓제목은 ‘세일즈맨의 죽음’이지만 연극 내용은 모든 직장인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현대의 직장인은 자신의 능력은 물론, 미소와 인간성을 팔러 돌아다니는 ‘세일즈맨’이기 때문이죠. 은행원인 저는 ‘금융상품’을 팔고, 건설회사에 다니는 친구는 ‘아파트’를 팔지요. 자신의 모든 것을 팔다가 정작 정체성과 가족을 잃는 우(愚)를 범하지 않는 것이 신세대 샐러리맨들의 과제인 것같습니다.

△이순재〓그렇습니다. 배우인 저도 탤런트(재능)를 ‘세일’해야 하는 직업인 셈이죠.(웃음) 젊었을 적 한창 영화촬영에 바쁠 때는 한 달에 1주일 밖에 집에 들어가질 못해 자식들에게는 소홀할 수 밖에 없었죠.

△도기탁〓윌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집 정원에 씨앗을 심으며 도시산업화로 잃어버린 자연의 푸근함과 광활한 알래스카를 그리워합니다. 영화 ‘레옹’에서 화분을 정성껏 키우는 킬러의 모습처럼 치열한 삶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 이 시대 소시민의 생명력이 아닐까요.

△맹지열〓극 중 아버지가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는 대상은 상상 속의 형님입니다. 그만큼 맘놓고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다는 뜻이지요. 부모가 10대 자녀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자식들도 아버지의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소연〓22년만에 다시 이 역할을 맡게 되셨는데 체력은 괜찮으신지요.

△이순재〓더 기력이 쇠하기 전에 연극무대에 꼭 한번 서고 싶었습니다. 무려 590마디의 대사가 나오는 3시간짜리 연극이지만 나이에 맞는 역할이라 어렵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직장인 단체 관객의 예약이 많은 것도 힘이 됩니다.

아서 밀러 원작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1949년 뉴욕에서 초연돼 퓰리쳐상 토니상 등을 휩쓴 20세기 고전으로 꼽힌다. 평일 7시반, 금토 3시 7시반, 일 3시. 1만2000∼1만5000원.02-399-1647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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